완풍대군의 봉호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0-02-19 조회수 : 8627
 
 
 

완풍대군의 봉호(封號)

      

李 東 奕(양도공종회 고문)


우리의 파조(派祖) 완풍대군께서는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시킨 공로로 척산군(陟山君)이 되고, 뒤에 다시 완산군(完山君)으로 개봉(改封)되셨다. 또, 조선조 고종 9년 임신년(1872)에는 환조(桓祖)의 장남으로서 완풍대군으로 추봉(追封)되셨다. 고종께서는 태조대왕이 임신년(1392)에 즉위하여 목(穆)․익(翼)․도(度)․환(桓) 4왕(四王)을 추존하였음에도 4왕의 자손들 중 그에 합당한 봉작이 미처 이루어지지 못한 분들이 있는 데 유념하여, 개국 480주년 되는 임신년을 맞아 미봉작된 4왕의 아드님들을 추봉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을 비롯한 일부 계층에서는 왕실에 아부하고 태조의 형제분들을 차별화할 뜻으로 '대군(大君)' 추봉 후에도 완풍군(完豐君), 혹은 완산군으로 위상(位相)을 격하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우리 파 종중에서까지도 일부에서는 이를 불가항력으로 여겨 대책 없이 이를 감수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나는 분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문제는 너무 중대하였으나 방도가 막연했던 것이다.

 종사의 근간(根幹)이랄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해 그 당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후손도 계셨으므로, 수십 년이 지난 옛 일이지만 종사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 때의 나의 체험을 여기에 적고자 한다.

  40여 년 전, 나는 대동종약원 전남지원의 분원장 회의에 병환 중인 백부(伯父) 용연(龍淵) 씨를 대리하여 참석하였다. 회의를 마치자, 당시 박 정권에서 재정을 협찬하여 종약원에서 발행한 《선원강요(璿源綱要)》라는 소책자를 배부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책을 펴보고 크게 놀란 것은 완풍대군 난에 '대(大)' 자가 모두 빠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흥분하여 종약원의 처사를 강력히 비난하고, 이 책자는 폐기해야 마땅하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다른 분원장들은 모두 말하기를, 이미 책이 전국적으로 나갔는데 전남만 배부를 안 한다고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완강히 버텼으므로, 결국은 다음 회의에 정오표(正誤表)와 함께 배부하기로 하고 그 날 회의를 마쳤다. 그 날의 울적했던 심정은 당장에라도 종약원에 쫒아가 결판을 내고 싶었으나 꾹 참고 기회가 있으리라고 마음의 결의만 다졌다. 그러나 그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서울에서 손님이 와서 나를 찾는데, 그는 《전주이씨 씨족대보(全州李氏氏族大譜)》 편찬위원장 이규환(李揆煥)이라는 분이었다. 종약원의 협찬으로 책을 내는데, 내용 등 모든 것은 종약원에서 결정한다고 하였다. 나는 이번이 기회다 싶어 하루 저녁을 그와 같이 지내면서 봉호 문제를 시정해주면 종약원 사업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니 바로 종약원에 가서 해결해주마고 약속하고 작별하였다.

 한참 지난 후 그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이 문제에 대해 종약원이 워낙 완강하니 날더러 올라와서 직접 해결을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꼭 올라갈 터이니 정확한 회동(會同) 일시를 정해 달라고 하였다.

그 날짜에 맞추어 아우 동건(東健)을 앞세우고, 규환 씨 보소(譜所 :《씨족대보》출판소)에 들러 그를 동반해 종약원을 방문하였다. 그쪽에선 이사장 이봉우(李鳳宇) 씨와 상임 사무국장 등 임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내가, 종약원에서는 어찌하여 고종 임신년의 추봉 사실을 무시하고 평지풍파를 일으켜 돈종(敦宗)의 대의를 저버리느냐고 항의하였다. 그랬더니 그쪽에서 말하기를, 여기 있는 책들을 보각(譜閣)에서 가져왔는데 원전(原典)이라 할 수 있고 우리는 원전에 따랐을 뿐이라고 하면서, 여기저기 완풍대군의 봉호가 잘못 기재된 부분을 찾아 지적하였다. 이에 나는, 책이란 만드는 과정에서 오서(誤書), 낙자(落字)가 있기 마련인데 이것 때문에 대원칙을 저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이야기가 오고갔으나 그들의 입장은 확고부동하여 설득할 여지가 없었다.

  그때 마침 누가 들어와, 전라도 사는 광해군(光海君) 자손들이 와서 임원님들을 뵙겠다고 한다 하니, 이사장 이하 모두가 따라 나섰다. 방 안에 우리 형제만 남게 되어 여러 책들을 훑어보았는데, 과연 대군의 봉호를 잘못 표기한 것들이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니 착잡했다.

  그런데 그 책들 곁에 방대한 분량의 《승정원일기》가 비치되어 있었다. 승정원(承政院)은 왕명의 출납을 맡은 기관으로, 그곳에서 정무(政務)의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이 《승정원일기》이니, 그 책의 사료적 가치는 실록을 능가하는 것이다. 임신년의 일기를 찾아 한참을 뒤적이다 보니, 놀랍게도 고종 9년 12월 4일 조에 파조 휘(諱) 원계(元桂)의 완풍대군 추봉 사실이 확연히 기록되어 있었다. 참으로 천우신조(天佑神助)한 일이었다. 한참동안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나는 이사장 이하 임원들을 불러 이를 확인시켰다. 모두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이사장은, "나는 노터치! 노터치!"를 연발하며 더 이상은 개입하지 않겠노라 하였다. 나는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종약원에서는 대원칙을 천명하셔서 앞으로는 이런 혼선을 막아주셔야 합니다." 라고 힘주어 당부하였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으나,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이 일이 파종회에 알려지자, 유신(有信) 종회장님, 주엽(柱燁)․계선(桂先) 이사님 등이 이를 확인하고 종약원과 교섭하여 종약원 간행물인《이화(李花)》제16호(1976년 2월 4일자)에 <재정서(裁定書)>라 제목하여 널리 공시하고, 그 후에 다시는 대군의 봉호에 혼선이 없도록 조처하였던 것이다.(2009. 3. 20)     

 
   
 
▒ 이전글 | 한천당 실적비명
 
 
뼇룄怨 씤꽣꽬 議깅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