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보 연혁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양도공종중 대동보 간행의 역사
양도공 22대손 이창헌
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의 족보 편찬
족보는 국가의 역사서와 같은 것으로, 조상을 존경하고 종족의 단결을 뜻하며, 후손으로 하여금 촌수(寸數)의 멀고 가까움에 관계치 않고 화목(和睦)의 풍을 이루게 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본래 족보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는데, 후한(後漢) 이후 중앙 또는 지방에 대대로 고관(高官)을 배출하는 종족이 성립됨에 따라 문벌과 가풍을 존중하는 사상이 높아져 육조(六朝) 시대에 이르러 족보의 작성 및 보학(譜學)이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사(高麗史)》 또는 고려시대 귀족 계급의 묘지명(墓誌銘)과 같은 사료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氏族系譜)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관제(官制)로서도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보첩(族屬譜牒)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명문 귀족(貴族) 사이에는 소규모로 필사(筆寫)된 계보는 이미 작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동족 또는 한 분파 전체를 포함하는 족보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출현하였다. 족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423년(세종 5)으로, 이때에 간행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 永樂譜≫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는 문화 유씨의 두 번째 족보인 1562년(명종 17) 간행의 ≪가정보 嘉靖譜≫(10책)로 알려져 왔으나1), 최근에 1476년(성종 7) 발간의 ≪안동권씨세보》인 《성화보(成化譜)》가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임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 조선 초기 15세기에 간행된 족보는 남양 홍씨(南陽洪氏, 1454), 전의 이씨(全義李氏, 1476), 여흥 민씨(驪興閔氏), 1478), 창녕 성씨(昌寧成氏, 1493) 등의 족보이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족보는 조선 초기인 15세기에 처음으로 출현하였던 바, 모든 성씨가 같은 시기에 족보를 간행한 것은 아니다. 어떤 종족은 16세기에, 어떤 종족은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에 비로소 족보를 간행하였던 것이다.2)

1) 이긍익,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14권, 문예전고, ‘족보’ 난.

2) 이상 두산백과(네이버 지식백과)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Ⅱ. 양도공 종중의 족보 간행
1. 전주이씨 양도공파보의 간행
양도공파는 완풍대군파에서 다시 분파한 종중이다. 즉, 완풍대군의 2남인 양도공의 후예들로 독립된 하나의 파를 형성해 종중을 운영해온 것이다. 이 종중에서는 족보에서도 역시 양도공의 후손들만을 수록하여 편찬했고, 따라서 역대 대동보의 이름도 고종조에 왕실에서 편찬을 주관한 두 번의 《선원속보》를 제외하고는 ‘전주이씨양도공파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추존(追尊) 4대왕을 포함한 제왕(帝王)의 자제들을 파조(派祖)로 삼아 독립 종중을 운영했던 전주이씨 후예들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양도공 후손들이 완풍대군의 아드님인 양도공을 파조(派祖)로 삼아 족보 간행 등 종중의 제반 실무를 운영해 나간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연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조선 초기 양도공 후손들이 낙향하여 영광을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에 거주하게 되면서, 대군의 다른 3형제 후손들과 교류하기에는 거리상의 난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대군의 장남 완원부원군 안소공 양우의 후손 대다수는 함경도에, 일부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거주했고, 3남 완남군 조(朝)의 후손들은 양양 등 주로 강원도 지역에 거주했으며, 4남 완령군 서의 후손들은 황해도 등지에 산거하였으므로 교통과 통신이 불편했던 그 시절 4형제 후손 전부를 망라한 대동보를 제작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둘째는 조선왕조를 반석(盤石) 위에 올린 건국공신으로 추앙받으며 태종 묘정에까지 배향된 양도공이었기에,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현조(顯祖)인 그분을 파조로 내세운다 할지라도 종중의 위상(位相)을 정립하는 데 하등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왕조의 정치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자긍심을 더욱 높이는 길이라 여겼을 수 있다.3)
3) 보완하면, 태조의 백형(伯兄)이자 양도공의 부친인 휘 원계는 여말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정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분이었다. 따라서 조선 말엽인 고종 9년 12월에 완풍대군에 추봉되기 직전까지는 정치·사회적 여러 가지 이유로 왕조에서 폄하 혹은 거론되지 않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이런 사정 또한 후손들이 대외적으로 양도공을 파조 혹은 현조로 내세운 사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뒤늦게 편찬된 전주이씨 족보

한편, 구성원 대부분이 추존 4대왕을 포함한 제왕의 후예였던 전주이씨들의 족보는 다른 성씨들에 비해 훨씬 뒤늦게 편찬되었다. 제왕을 감히 그 조상으로 일컬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매여 조선 초기에는 왕실족보인 《선원보(璿源譜)》 외에 따로 각각의 파보를 제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4)
양도공의 후손들 또한 공의 서거 후 이미 수백 년이 흘러 수많은 자손이 전국에 퍼져 있음에도 이러한 사유로 인해 수보하지 못하고, 자신들과 촌수(寸數)가 가까운 동족(同族)들만의 가승(家乘) 제작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점차 수백 년의 세월이 누적되면서, 이처럼 족보 없이 종중을 운영하며 선조를 숭배하고 동족 간의 화목과 단결을 도모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종중의 뜻있는 구성원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서 긴급히 수보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미루다가는 종족 간에 너무 대(代)가 멀어져 동족 여부를 구별할 수조차 없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절박함을 드러낸 글의 일부이다.

세상에서 대성(大姓)이라 일컫는 종족으로 족보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유독 우리 이씨만 그것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국성(國姓)인 까닭이다. 나라에 ≪선원보략(璿源譜略)≫5)이 있으므로 별자(別子)6)의 시초 단계에서는 정녕 감히 사사로이 족보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환조(桓祖)의 별자 완산백(完山伯)으로부터 이미 십여 대(代)가 되었고, 또한 대수(代數)가 먼 후손들이 침체가 심하다. 진실로 지금 오늘 별도의 족보를 만들지 않으면 어찌 세차의 착인(錯認)과 자손 간의 구별 없음이 이 글이 말하는 바와 같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지금 이후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7)

이런 촉박한 심정에서 편찬이 시작된 양도공파보는 초창기에 당연히 온갖 시련과 우여곡절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양도공 서거(1417) 300여 년이 경과했으니 아무리 적게 셈해도 10대 이상의 자손이 전국으로 퍼져 나간 뒤의 수보(修譜) 준비였던 것이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4)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는 '군왕불감기조(君王不敢其祖)'라고도 하여 제왕 또는 임금은 감히 그 임금을 시조로 하는 종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임금님은 모든 백성 공동의 부모 곧 국부(國父)이므로 한 파의 시조 또는 중시조(中始祖)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님을 1세로 하여 세대(世代)를 따지는 것은 불경(不敬)스러운 것으로 여기어 왔다.-이상,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편, 《전주이씨 대관》 참조.

5)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의 약칭. 숙종(肅宗) 7년(1681)에 처음 간행된 것으로 역대의 임금이 새로 즉위할 때마다 중교(重校)?보간(補刊)되었던 것을 고종 34년(1897)에 합간하였음.

6) 제후(諸侯)의 정실이 낳은 차남(次男) 이하(以下)의 아들.

7) 영조 《경오보》의 서문 중 일부이다.

3. 양도공 종중의 족보편찬사

다음에 양도공파보의 시원(始源)이 되는 《경오보(庚午譜)》로부터 지금 편찬하고 있는 《을미보(乙未譜)》까지의 편찬 역정과 특기할 만한 사항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가. 경오보(庚午譜)와 병진보(丙辰譜, 1796)

《경오보》는 양도공파에서 최초로 편찬된 족보다. 하지만, 그 서문에 나오듯이, 이것은 영조 16년 경신년(1740)에 초보(初譜)가 만들어진 뒤, 경오년(1750)까지 10년간이나 계속 보완되었지만 간행되지 못했다.
서문에 의하면, 《경오보》의 수보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만취당의 후예 휘 지익(之翼)과 한천당의 후예 휘 운고(雲?)가 일찍이 족보 편찬을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니, 이를 안타깝게 여긴 휘 수민(洙閔)8)이 세일제(歲一祭)9)때 다시 발의하였다. 그분이 자신의 뜻에 공감하는 종숙(宗叔) 만징(萬徵)10)과 족제(族弟) 수빈(洙斌)11)과 더불어 책임을 나누어 맡아, 해를 넘기며 일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수빈이 중도에 또 세상을 떠나버리니 이로 인해 편찬 작업은 또다시 중단되었다. 결국 9년이 지난 후 기사년(1749)에야 비로소 수빈의 동생 수흥(洙興)12)과 함께 초보(初譜)를 완성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처럼 애써서 만든 초보는 재정적 여건 등으로 인해 결국 간행되지 못했다.
그 뒤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정조 20년 병진년(1796)에 이르러서야 종파(宗派) 복초재(復初齋) 형익(亨益)의 5대손인 휘 이감(以鑑)13)에 의해 이 초본이 비로소 다시 보완되어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휘 이감은 당시 양도공파 종손인 진사(進士) 매죽헌(梅竹軒) 이석(以錫)과는 삼종형제간이었으므로, 책임감을 느껴 종손을 보좌해 이 족보의 간행을 서둘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병진보》(1796)는 양도공파에서 실제 간행된 현전 최고(最古)의 족보이다. 이 족보에는 자체의 서문 대신, 이것을 처음 편찬하기 시작했던 휘 수민의 서문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이 서문을 쓴 해가 영조 26년 경오년(1750)으로 표시되어 있다.
양도공파에 전하는 역대 족보에는 휘 수민의 이 서문이 영조 17년 신유년(辛酉年, 1741)에 제작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앞에서도 거론했듯이, 이 글 본문 내용에 기사년(己巳年, 1759)의 일이 나오는 등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것이 실제로는 경오년에 다시 보완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늘날 전하는 《병진보》는 모두 3권 3책(冊)14)으로 되어 있다.15) 하지만, 이 는 초창기 족보인 만큼 당연히 전체 종원을 망라하지 못했고, 수록된 대부분의 인물들에 대해 그 소속과 세차(世次)를 밝히고 자(字)나 배위(配位) 정도만을 기록했을 뿐이며, 생졸년도 제대로 수록하지 못한, 여러 면에서 불완전한 족보라고 할 수 있다. 그 체제 및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권
전주이씨족보 서-숭정기원후 세 경오 4월일 후손 수민 근서
환조 구(舊) 신도비명(이색 지음)16)
연무성환대왕정릉신도비명-서원군 정총 봉교찬
전주이씨세보17)
공신 회맹축(會盟軸)
발문(숭정 후 3병진 仲冬 양도공 14대손 이감 근발)

제2권 및 제3권
휘 원계(완풍대군) 이하 당시까지 출생한 이들을 수록한 자손록(子孫錄)18)

8) 사부공의 장남 구(坵)의 증손이다. 현종 갑인년(1674)에 태어나 영조 병자년(1756)에 졸하였다. 향년 83세. 수직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역임

9) 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제사. 관행적으로 시제(時祭), 시사(時祀), 시향(時享)이라고도 한다.

10) 난헌공 난(鸞)의 후손.

11) 사부공 극부(克扶)의 후손.

12) 휘 수흥(洙興)은 수빈의 아우로 숙종 무진년(1688) 생이며 졸년은 미상이다.

13) 일명 이황(이황)이라고도 한다. 1749-1820. 《병진보》 말미에 이분의 발문이 실려 있어서 저간(這間)의 사정을 일부나마 규지할 수 있다.

14) 지금은 권(卷)이나 책(冊)을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권과 책을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권은 책을 내용에 따라 구분하는 단위이고, 책은 제본(꿰어 묶음)을 하고 표지를 붙여 만들어진 하나를 의미한다. 따라서 1책 속에는 여러 개의 권이 포함될 수 있다.

15) 모두 3권으로 나누어 각각을 3책에 담은 이 책은 종가 대표로서 1985년의 《을축보》를 편찬하신 선친(추정 동혁)께서 입수하여 영인, 소장하셨다.

16) 조선 건국 4년 전 1388년.

17) 시조 사공 공으로부터 환조대왕까지의 약력을 적었다.

18) 자손록은 ‘계보도’를 달리 표현한 말이다. 이는 어느 족보에서나 중심을 이루는 부분으로 전질(全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 정미보(丁未譜, 1847)
《정미보》는 헌종 13년 정미년(정미년, 1847)에 간행된 족보로 모두 18권 7책으로 되어 있다.19) 목활자본(木活字本)이다. 당시 종원 중 대다수를 수록하였으므로 양도공파 최초의 본격적 대동보라고 할 수 있다. 16대 종손(宗孫) 휘(諱) 민수(民秀)가 수보를 계속하여 완성했다. 그분의 발문을 보면, 이 족보가 이뤄지기까지의 경로를 짐작할 수 있다.

슬프다. 중세(中世) 이래로 여러 차례 족보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그것을 편찬할 겨를이 없었으니, 이는 또한 시운(時運)이 고르지 않아서 그랬던 것인가. 족조(族祖) 휘(諱) 수민(洙閔) 씨와 종렬(宗烈) 씨가 각 집안의 숨은 문서들을 널리 살펴 편집해 초고(草稿) 수단(收單)을 만들고, 또 책의 머리말을 써서 백 년(百年) 후의 이목(耳目)에 밝게 비추었는데, 지금 글씨의 자취를 보니 더욱 느낌이 일어나는 바가 있다. 지난 해 겨울에 족형(族兄) 지영(址榮) 씨가 이 수단(收單)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후대에 오래도록 전할 방도를 세우기를 권하였다. 나 또한 이 보첩(譜牒)에 이어, 계속해서 편찬할 뜻을 지녔으므로 각 파의 가승(家乘)을 가져오도록 해서 새것과 옛것을 합록(合錄)하여 마침내 인쇄에 부쳤다.20)

거론된 내용을 보면, 《정미보》가 완성되기까지 파보 편찬을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종중 인사들의 헌신이 있었으며, 그들이 오랫동안 축적한, 그러나 아직도 책으로 간행되지 못한 많은 수단(收單)들을 당시 종손이었던 편찬자가 인계받아 그것들을 새 족보 안에 수렴함으로써 보다 충실한 대동보가 제작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미보》 전체의 체제(體制)와 목차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책 제1권
전주이씨양도공파보 서-숭정 4정미 모춘(暮春) 덕은 송달수 서
보서-숭정 기원 후 4정미 유하(維夏) 무령태수 연안 이명적 근서
구서(舊序)-숭정기원 후 세백계(歲白鷄) 동월일(冬月日) 불초후손 수민 근서
숭정 후 3경신 불초후손 전(前) 정언(正言) 종열 근서
환조 구(舊) 신도비명-한산 이색 찬
환조 신(新) 신도비명-연무성환대왕정릉신도비명, 서원군 신 정총 봉교찬
포총교지, 전주이씨 선계, 범례(凡例)21)

 

제2책~제7책22)
7책으로 된 《정미보》 중에는 제4책의 중간부터 판형이나 내용은 똑같으면서도 쪽수를 표시하는 천자문 글자가 4책짜리와는 달리 표시된 이본이 있다.
휘 원계로부터 당시에 태어난 이까지의 자손록

19) 《정미보》 중에는 12권 4책으로만 편철된 책도 있는데, 이는 구입하는 이의 재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편질을 줄여 배포한 것이다. 주로 영광 본동에 거주하는 이들이 입향조 사맹공 휘 효상의 자손만 등재된 4책짜리를 소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20) 휘 민수의 ‘전주이씨 양도공파보 발(跋)’의 일부를 국역한 것이다.

21) ‘일러두기’이다. 편수기록의 내용을 아는 데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22) 7책으로 된 《정미보》 중에는 제4책의 중간부터 판형이나 내용은 똑같으면서도 쪽수를 표시하는 천자문 글자가 4책짜리와는 달리 표시된 이본이 있다.

다. 갑자보(甲子譜, 1864)

《갑자보》는 고종이 등극한 뒤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대원군의 의도에 의해23) 《선원속보》24)의 형태로 간행되었다. 완풍대군파에서도 당연히 수보에 참여하여 《선원속보(璿源續譜)》 총 16권을 편찬하였는데25), 이는 완산군 원계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그분의 후손들을 다 수록한 것이었다.
이 책은 《선원계보기략》의 체재를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선원속보(璿源續譜)》로서 편찬되었으므로 당연히 ‘전주이씨 선계’나 주요 문헌들을 따로 게재하지 않았으며, 파보 차원의 서문이나 발문이 생략되고, 범례(凡例)에 이어 ‘자손록’이 곧바로 전개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족보의 권8에는 이 족보에 간여한 양도공파의 인물들이 나오는데, 교정(校正)은 유학(幼學) 윤국(潤國)과 문필(文弼)이, 유사(有司)는 유학(幼學) 지백(至白)과 이필(以?)이, 선사(繕寫)는 유학(幼學) 기수(基秀)와 양렬(亮烈)이 담당하였다. 이들 중 이필은 양도공의 둘째 손자 월평군의 후예로 담양 출신인 바, 후일 성균관 진사(進士)가 되어 이름을 떨쳤다.

23) 조선왕조는 오랫동안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혈통을 밝히기 위해 왕실족보 편찬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 동안 선원록(璿源錄)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왕실족보가 출현하였다. 그 중 선원속보(璿源續譜)는 19세기 철종 말부터 시작하여 고종 초에 걸쳐 왕실인 전주 이씨의 대동보 발간을 목적으로 종친부에서 주관하여 제군왕자들을 파조로 하여 만든 왕실족보이다. 선원속보는 조선왕조 족보에서 가장 늦게 나타난 족보이다. 이 족보는 110개 이상 파보를 종합하였으며, 수록인원도 11만 명이 넘을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하고 여러 차례 改刊하면서 많은 인원과 물력을 동원하여 편찬하였다. 대동보의 편찬은 정조 때부터 주장되었지만 종부시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철종과 고종조에 발간된 선원속보는 그 의미가 특별하였다. 안동김씨의 오랜 세도정권으로 영락한 왕실 방계인들이 선파(璿派)로서의 군역과 잡역의 면제라는 사회적 특권을 지켜내려는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도한 사람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따라서 선원속보의 발간은 처음에 선파들의 군역, 잡역을 면해주기 위한 증빙자료로서 기능하였지만, 점차 속보발간을 통한 문중의식의 고양을 통해 종친세력을 결집시키고 이를 통해 왕실의 족적 기반을 강화하겠다는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의도가 더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상 김일환, 조선 말기 선원속보(璿源續譜) 발간경위와 정치적 의미(순천향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27권 0호, 109 ~ 153 페이지에서 轉載)

24) 기존의 왕실족보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 이어 작성했다는 의미에서 ‘선원속보’라 했다.

25) 양도공 종중에 현전하는 《갑자보》는 모두 8책으로 되어 있다. 이를 포함한 전16권에 당시 완풍대군파 전체의 종원이 수록된 듯하다.

라. 기해보(己亥譜, 1899)

《갑자보》를 편찬하고 35년이 지난 후, 기해년(1899)에 양도공을 중시조(中始祖)로 삼아 파보(派譜) 12권을 편찬하였다. 목활자본(木活字本)이다. 이를 《기해보》라고 한다. 이 족보는 내용을 권수(卷數) 대신 갑(甲)부터 신(辛)까지의 천간(天干)으로 구획하고 있는데, 끝 책의 맨 나중 장에 영광 본동(本洞)26)의 우리치 재각27)에서 중간(重刊)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특기할 일은, 이 《기해보》를 저본(底本)으로 삼아, 다음해인 경자년(1900)에는 종정원(宗正院) 주관으로 완풍대군파 전체를 망라한 《선원속보》가 편찬되었다는 점이다.28)
《기해보》의 전체 체제와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보서(譜序) 기해년 1899년으로 고종 36년이다. 광무 3년.
9월일 풍양(豊穰) 조기하(趙夔夏) 근기
구서(舊序)
포총교지, 전주이씨 선계
범례(凡例)
자손록(子孫錄)

 

이 족보는 발문(跋文)을 따로 쓰지 않고, 책 뒤 발문 자리에 《정미보》의 것을 그대로 옮겨쓰고 있다.

26) 종가와 부조묘가 있는 영광 묘량면 일대를 지칭한다.

27) 묘량면 신천리 우리치에 있는, 쌍매헌공을 모신 선산의 재실로 이름이 ‘우리재(遇李齋)’다. 현재의 재각은 《신미보》(1931) 수보 후에 신축한 건물이므로, 여기서는 그 이전 구 재각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28) 참고로, 그 당시 《선원속보》 ‘경자보’ 수보에 참여한 전주이씨 전체 종중 가운데, 책 수가 가장 많은 파는 효령대군파(44책)였고, 다음이 완풍대군파(40책)였다고 하니, 종원 수로만 보아도 전주이씨 중에서 완풍대군파가 점하는 위상이 어떤 것이었겠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바이다.

마. 신미보(辛未譜, 1931)

《기해보》 편찬 32년 후 신미년(1931)에, 《선원보략(璿源譜略)》 2권에 이어진 12권의 양도공파보를 편찬하였다.30) 따라서, 이 족보의 겉표지 제목은 《선원속보》로 되어 있다. 《선원속보》의 형태를 표방한 만큼, 이 책 역시 예전의 《갑자보》처럼 전주이씨 선계(先系) 설명이나 주요 문헌 수록 없이 범례(凡例)만 게재한 뒤 곧바로 ‘자손록’이 시작되고 있다. 다만, 이 책은 《선원속보》라고 표제했음에도 이전 《갑자보》나 《경자보》와는 달리, 수록 대상을 축소하여 ‘완풍대군 대동보’가 아닌 ‘양도공파 대동보’로 편찬하였다.31)
끝 책 말미의 항렬식에 이어 덧붙여진 <유사록(有司錄)>에 의하면, 당시 족보 간행에 간여한 분은 다음과 같다.

종손(宗孫) : 용연(龍淵)
문장(門長) : 윤백(潤栢)
도유사(都有司): 문봉(文鳳)
부유사(부有司) : 명섭(明燮)
장재(掌財) : 창섭(昌燮)
전(前) 의관(議官) 현거(鉉巨)
교정(校正) : 필신(泌信)
유사(有司) : 우섭(右燮), 경섭(敬燮), 길섭(佶燮), 이황(以煌), 문선(文善), 광로(光老), 정연(定淵)
선사(繕寫)32) : 찬신(讚信), 형섭(亨燮), 희섭(熙燮)
감인(監印) : 봉로(奉老), 문립(文立), 현택(鉉澤)

12책 권12의 끝 페이지에 의하면, 편집 겸 발행인으로 표시된 이현거(李鉉巨)33)의 주소는 경성부 운니동 92번지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최종 편집을 한 뒤 경성 익선동의 흥문당 인쇄소에서 인쇄했음을 알 수 있다. 발행소는 그의 실제 집주소인 전북 부안군 보안면 하입석리 이현거 방(方)과 전남 영광군 묘량면 운당리 이창섭(李昌燮) 방(方)으로 되어 있다. 12책 1질의 정가는 20원이라고 하였다.


《신미보》 수보 후, 종손인 경당(휘 龍淵)은 단합된 문중의 힘과 재정적 여력을 활용해 수많은 문중의 현안들을 해결하였다.34)

30) 이 책은 석판본(石版本) 인쇄물이다. 석판본은 석회석 위에서 물과 기름이 혼합되지 않는 원리를 이용하여 판판한 돌의 표면 위에 비누와 지방을 섞은 재료로 글자와 그림 따위를 제판하여 찍어낸 책이다. 석인본이라고도 한다. 이 석판인쇄는 다른 인쇄에 비해 비교적 공정이 간단하고, 설비가 적게 들면서 대량 인쇄할 수 있다. 또 그림·도안·삽화 등을 비교적 정밀하게 찍어낼 수 있었다. 20세기 초기에 싹터 중기 이후까지 성행하여 그 인본이 매우 많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간인본(刊印本) 참조.
이 족보는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자료로 보아, 편찬 6년 전 1925에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13권 13책의 《전주이씨양도공파보》를 저본(底本)삼아서, 이것을 보완하여 편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시 선원속보를 표방한 형태의 이 파보는 부안 거주 병로(秉老) 종현의 주도와 재정 지원에 힘입어 편찬, 간행되었으나, 널리 배포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병로 종현은 양도공파 최초로 족보 《병진보》를 간행한 휘 이황(이감)의 현손이다.

31) 자손록의 시작 부분에서 완풍대군 아래에 4세 봉군된 안소공의 자손들을 다 수록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끝날 뿐 ‘자손록’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32) 부족한 점을 고치고 보충하여 정서함.

33) 이 족보 수보에 실무적으로 가장 공헌이 컸던 분은 편집 겸 발행인인 이현거라는 분일 것이다. 그의 《갑오보》 이후 족보 명은 현기(鉉璣)다. 자는 옥헌(玉憲), 호는 정운(停雲)이다. 그는 고종 갑술년(1874)에 태어나 195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1895년에는 장릉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901년에는 통훈대부로서 중추원 의관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양도공파 최초로 족보 《병진보》를 간행한 휘 이황(以황, 일명 이감)의 5대손이자, 《신미보》에 앞서 독자적으로 1925년 《전주이씨양도공파보》를 편찬, 간행한 병로(秉老) 씨의 장조카이기도 한데, 그가 족보 편찬에 열성을 다한 것은 이 같은 가문의 내력과 연관이 컸을 것이다.

34) 영당사(影堂祠) 중건(1934)을 발의하여 완수함으로써 고종조 대동훼철 때 헐린 사당을 사림과 후손의 헌성으로 중건하고, 양도공 영정과 이응도를 모사하여 봉안한 뒤, 강학(講學)과 춘추 향사(享祀)의 전통을 이을 수 있게 하였다. 장성 오산사(鰲山祠)의 복건(復建)에도 참여했으며, 우리치(遇李峙) 선산의 우리재(遇李齋)를 신축했고, 당산 산소동의 봉귀재(鳳歸齋)를 보수했다.

마. 신미보(辛未譜, 1931)

갑오보》는 당시 양도공의 20대 종손이던 경당 공이 주도하여 편찬하였다. 경당 종손은 6.25 전쟁 직후 일가들의 생사를 파악하고 상호 애족의식을 환기함이 급선무라 여겨 문중 원로들과 더불어 대동보 편찬을 도모했던 것이다. 경당의 주도와 문중 원로들의 헌신적인 협찬에 전국의 양도공파 종친들은 전쟁 후의 궁핍한 재정 형편 가운데서도 거족적 지지를 보냈다.
당시 보사(譜事)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발문에 따르면, 《갑오보》는 계사년(癸巳年 : 1953) 11월에 종가(宗家)에서 발의되자 문중대표들이 만장일치의 찬동하였으므로 곧바로 편찬을 착수했다. 임원을 나누어 정하고,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사는 종원들에게 글을 띄워 통지하고 수단(收單)을 받았다. 그 후 14개월이 지난 뒤, 영광 묘량 당산의 종가에서 대동보 15책을 석판본(石版本)으로 간행해냈다.
모두가 가난하고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문중 지도자들의 헌신과 종원들의 폭발적인 호응이 이뤄낸 값진 성과였다.
《갑오보》의 체재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전주이씨양도공파보 서(序)-불초(不肖) 사손(嗣孫) 용연(龍淵) 근서
구서(舊序), 구발(舊跋)35)
범례, 항렬식, 전주이씨 선계
자손록-완풍대군 원계부터 이하 7세까지 수록36)
발(跋)-문경(文敬), 경섭(敬燮), 호신(浩信), 경신(炅信), 두섭(斗燮)

 

특기할 점은, 예전 족보에서 책 앞부분에 수록해왔던 완풍대군이나 양도공 관련 귀중한 문헌들, 즉 신(新)·구(舊) <환조신도비문>이나 <포총교지> 등을 게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족보와 함께 편찬했던 《전주이씨양도공파세덕지》에 그런 주요 문헌들이 별도로 집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세덕지(世德誌)는 대대로 쌓아 내려오는 아름다운 덕행을 기록해둔 책이라는 뜻이다. 묘지명, 행장 등이 주축이 된다는 점에서 ‘지장록(誌狀錄)’이라고도 하는데, 양도공 종중에서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세덕지를 편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도공종중 세덕지의 원류는 순조 34년에 종중에서 단행본으로 편찬한 《양도공실기(襄度公實記》37)라 할 수 있으니, 그 연원은 상당히 깊다고 하겠다.
이 족보 제15권의 말미에는 <임원록>이 게재되어 있는데, 그 방명(芳名)을 다음에 옮겨둔다.

 

종손(宗孫) : 용연(龍淵)
문장(門長) : 윤도(潤道)
도유사(都有司) : 인섭(麟燮)
부유사(副有司) : 금신(錦信), 두섭(斗燮)
장재(掌財) : 문경(文敬), 경신(炅信)
총무 겸 교정 : 호신(浩信)
교정(校正) : 경섭(敬燮), 찬신(讚信)
내무(內務) : 석연(石淵), 현옥(鉉玉)
외무(外務) : 판신(判信), 성신(成信), 효신(孝信), 길연(吉淵), 현백(鉉栢), 택신(澤信)
감인(監印) : 유신(有信), 문립(文立)
간사(幹事) : 광로(光老), 문탁(文鐸), 원신(元信), 명신(明信), 상남(相南), 병섭(秉燮) 응신(應信), 기성(基聲)
선사(繕寫) : 점섭(點燮), 동혁(東奕), 국신(局信), 용신(龍信), 학로(鶴老), 지신(止信), 석로(石老)

 

실로 많은 분들이 참여한 보사였다. 경당은 위선사에 열성을 지닌 문중인사를 찾아내어 적재적소에 역할을 맡겼고, 임무를 부여받은 종원들은 보사에 참여하는 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으므로, 대동보의 성공적인 간행을 위해 한결같이 신명을 다했다.
당시에 보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분들은 서문과 발문을 남겨, 그 편찬 과정은 물론 역대 대동보 수보의 역사와 의의를 피력했는데, 거기에는 오늘날 우리가 참고할 자료가 많다.
경당 종손은 《갑오보》 편찬 후, 《신미보》 때 그랬던 것처럼, 문중의 여력을 모아 문중의 주요한 현안과 역사(役事)들을 완성하였다.38)

35) 역대 대동보의 서문과 발문을 한 군데 모아 수록함으로써 종중 족보 편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도록 하였다.

36) 완풍대군의 7세, 즉 6대손까지 대군 슬하 4형제 자손을 수록하여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했다. 그 다음 대부터는 양도공 자손만을 기록했다.

37) 양도공 유사, 포총교지, 회맹축, 화상찬, 이응도찬 등 양도공 관련 모든 문서를 모아 편찬한 것으로 순조 34년(1834)에 간행되었다. 모두(冒頭)에는 전 참봉 울산김씨 김장환(金章煥)의 서문이 실려 있다.

38) 종가의 사랑채이자 종회각인 상선당(相善堂)을 중수하고, 양도공 선산의 고양재(高陽齋)를 옛 재실 터에 다시 건립하였다. 또, 정부인(貞夫人) 산소가 모셔진 담양 홍암 선산의 명산재(明山齋) 서재(西齋)도 신축하였다.

사. 을축보(乙丑譜, 1985)

《을축보》(1985)는 1983년 계해년 봄 여양군 시제 때 명산재(明山齋) 총회에서 발의되어 보사를 시작한 뒤, 양도공 종가 내 종회각 상선당(相善堂)에서 갑자년(1984) 10월까지 편찬을 마쳤다.39) 그 후 몇 개월의 교정 기간을 거쳐 1985년 1월 초, 4·6배판 양장본 전5권으로 간행하였다. 이 족보는 1984년 12월에 편찬 및 인쇄 일체를 완료했으며, 책 말미 발행 연도(1985년)에 맞춰서 《을축보》라고 명명했다.
편찬위원장 국신(國信) 종현과 총무로 선임된 동혁(東奕) 종가대표가 보사의 전 과정을 주도하였으며, 재무 현우(鉉右) 종현과 석신(碩信) 상임 고문, 태연(泰淵) 상임 부회장 등이 보소(譜所)에 상주(常駐) 또는 자주 방문하여 진행 상황을 살폈다. 최종 교정기간에는 총무인 동혁 종현과 교정을 담당한 희섭(熙燮) 종현이 인쇄처이자 출판사인 대전의 회상사(回想社) 근처에 상주하며 현로(賢勞)를 다했다.

 

《을축보》 편찬위는 대동보와 함께, 세덕지 편찬의 전통을 살려 《전주이씨양도공파세덕지》도 편찬하였다. 역시 4·6배판 양장본으로,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담고 있다.
《을축보》의 체재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전주이씨양도공파보 서(序)-갑자 황화절(黃花節) 후손 국신 근서
구서(舊序), 구발(舊跋)40)
범례, 항렬식
전주이씨 선계
발(跋)[갑자(甲子) 납월(臘月)41) 태연(泰淵)]
편찬후기[1984년 납월 편찬위원장 국신(國信)]

 

여기서 ‘편찬후기’는 일부 종원들이 임의로 별도의 족보를 추진하는 것을 막아보고자 《을미보》 집행부에서 백방으로 노력했던 과정을 담고 있는 글이다. 대동보 수보를 결의하고 편찬을 진행하고 있던 편찬위는 전북 부안에 거주하는 현섭(鉉燮) 씨 등이 대종중의 승낙 없이 1982년 12월부터 ‘양도공파보 간행위원회’를 구성해 종원들에게 참여를 종용하는 통문을 보내는 것을 인지하고, 몹시 고심했다. 이에 위원장 등 집행부에서는 그 상황을 중단시키고자 그분들을 만나 누차 설득하고 많은 타협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42)

 

《을축보》 제5권 말미에는 참여한 분들의 명단, 곧 <임원록>이 게재되어 있다.

 

다음에 그것을 옮겨둔다.
종손 : 규헌(奎憲)
고문 : 문채(文彩), 인섭(?燮) 경신(炅信), 석신(碩信, 상임), 을호(乙浩), 현오(鉉午), 현종(鉉淙), 해진(海鎭)
위원장 : 국신(國信)
부위원장 : 태연(泰淵, 상임) 기용(淇榕), 대로(大老), 춘래(春來), 동보(東保)
총무 : 동혁(東奕)
재무 : 유신(有信), 현우(鉉右)
기획 : 용헌(勇憲)
교정 : 현춘(鉉春), 현옥(鉉玉), 희섭(熙燮), 대연(大淵)
감인 : 창신(昌信), 문호(文昊), 현필(鉉珌), 필연(畢淵), 노복(老福) 대연(大淵), 녹헌(錄憲)
감사 : 기동(基東), 원휘(元煇)43)

39) 1983년 5월 25일 종회각에서 각 지파 대의원 29명이 전원 참석한 가운데 도유사의 사회로 회의를 개최했던 바, 전원이 찬성의 뜻을 표하였으므로 편찬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이상 《을축보》 끝에 부착한 국신 편찬위원장의 ‘편찬후기’ 참조.

40) 역대 대동보의 서문과 발문을 모아 수록함으로써 종중 족보 편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도록 하였다.

41) 음력 12월을 달리 부르는 말.

42) 하지만, 이처럼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결국 협의는 결렬되었고, 1984년 10월, 그분들이 별도로 편찬한 4권 1질의 《전주이씨 완풍대군 제2자 양도공파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1984년 9월의 일이다.

43) 세무서 고위직을 지낸 세무사로서, 당시에는 ‘이원휘세무회계사무소’를 경영했다. 후일 양도공종회장으로 봉무하며, 담양 명산재 중건을 주도했다.

아. 을미보(乙未譜, 2015)

《을미보》44)는, 2010년 담양 시제일 이후 발간의 당위성이 매년 논의되었으나 시작하지 못하던 중 양도공재경종친회 동재(東宰) 회장에 의해 정식 발의되어, 2013년 1월에 편찬위원회가 구성되고, 그 위원장에 동재 종현이 취임하면서 본격 추진되었다.
편찬위는 그 후 3년간의 각고 끝에 2016년 8월, 양장본 4권으로 《을미보》를 발간하였는데, 모두 5,000여 쪽이 넘는 책의 부피를 고려하여 가벼운 고급 용지를 사용해 제본하였다. 또한, 컴퓨터시대에 즈음하여 신세대들을 포함해 누구나 쉽게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전자족보도 함께 제작하였다.
이번 《을미보》는, 지난번 《을축보》 때 전북 부안에서 별도 편찬된 족보에 참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누보(漏譜)가 된 분들에게까지 문호(門戶)를 활짝 열어 대동보로서의 의미를 더하고, 종원들의 화합을 꾀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을미보》 편찬위는 대동보 4권과 함께, 예전의 세덕지에 해당하는 《양도공파 인물보감》 2권도 별도로 편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선정된 모든 인물 관련 문헌들을 모두 국역(國譯)해 수록하였고, 관계된 컬러 사진 등을 부가하여 누구나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이 족보의 착수 후 완성까지, 상대적으로 많은 세월이 경과한 것은 무엇보다도 종원들에게 대동보 참여를 권유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는 시대상의 격변으로 인해 종원들의 족보에 대한 관심이 예전과 같지 않은 데서 야기(惹起)된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44) 책이 병신년(2016)에 간행되었음에도 ‘을미보’라 명명한 것은 어감상의 이유에서이다.

Ⅲ. 맺음말

앞에서, 소략하게나마 양도공 종중의 족보편찬사를 살펴보았다. 최초의 본격적 대동보인 《정미보》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천착(穿鑿)해 보았고, 어려운 시대환경 속에서도 숭조돈종에의 의지로써 족보 편찬에 사명감을 보였던 선인(先人)들의, 수보(修譜)를 위한 피어린 노력도 조감(照鑑)해 보았다.
양도공 종중은 왕실과 뿌리를 함께한다고 하여 수보의 시기가 늦었지만, 그래도 뜻있는 인사들의 헌신에 의해 영조조에 초보(草譜)를 만들었고, 그 토대 위에 불완전한 대로 정조조에 《병진보》를 간행했으며, 그 후 오랜 세월 축적된 역량 위에 헌종조에는 《정미보》를 간행했다. 이후 세대가 바뀔 때마다 종원들의 대동보 편찬의 열기는 타올랐으며, 《갑자보》, 《기해보》, 《신미보》, 《갑오보》, 《을축보》를 거치며 쌓아올린 연면한 전통이 오늘에 이어졌다.
양도공종중의 족보편찬사를 공부하면서 뭉클한 감회를 견디기 어려운 적이 많았다. 우리가 오늘날 자신의 뿌리와 가문의 역사에 대해, 그리고 선조들의 거룩한 얼에 대해 소상히 알고, 긍지를 느끼며 옷깃을 가다듬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결코 우연(偶然)의 산물이 아니었다. 자신과 동족의 근원을, 선조와 후손 사이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를 추구하고 탐색했던 선인(先人)들의 오랜 희생과 헌신 덕분이었음이 분명했다.
족보사를 통해 살펴본 양도공종중은 위대했다. ‘은근과 끈기’라는 한민족의 특성에 걸맞게, 양도공 서거 이후 300여 년이 지나 수많은 자손들이 전국에 걸쳐 산거하였음에도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수보(修譜)의 전통을 이뤄냈고, 수보의 전통이 굳건해질수록 종중은 더욱 융성해지며 ‘숭조돈종’이라는 결실도 얻어냈다. 또한, 수보하는 과정에서 종중의 구성원들은 끝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훌륭했던 선조들처럼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를 희구하며,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이바지를 다짐했다. 요컨대, 미래에 대동보 수보의 전통이 부단히 이어져야 하는 소이(所以)가 여기에 있었다.(1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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