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풍대군
완풍대군(完豊大君)
-고려조 추충절의보리공신 완산군 ․ 양평공-
휘(諱: 돌아가신 어른의 이름)는 원계(元桂)이고, 호(號)는 불사재(不思齋)이며, 시호(諡號)는 양평(襄平)이다. 
공은 환조대왕(桓祖大王: 휘 子春)의 장남이니,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환조의 배위(配位)가 모두 세 분인데[王凡三娶], 초취(初娶) 부인이 한산 이씨(韓山李氏)이고, 다음이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휘 成桂, 이하 태조로 지칭함.)의 어머니로서 조선 건국 후 의혜왕후(懿惠王后)에 추봉(追封)된 최씨이며, 다음이 의안대군(諱 和)의 어머니인 정안택주(貞安宅主) 김씨이다. 대군의 어머니 이씨가 대군이 4세 되던 해 돌아가시자, 환조께서 최씨에게 다시 장가들어 태조를 낳았으며, 그 후 다시 김씨를 배위(配位)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완산실록(完山實錄)」 및 이색의 「이자춘신도비명(1387)」, 정총․권근의 「환왕정릉신도비명(1393)」)
공은 고려 충숙왕 17년(1330) 함경도 화령부(和寧府: 후일의 영흥부) 흑석리(黑石里)에서 탄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공과 태조, 의안대군의 3형제는 우애가 매우 두터워 항상 같은 곳에서 함께 거처하였다고 한다.(『태조실록』「총서(總書)」) 
공은 유년시절부터 문무(文武)를 겸전하여 가문을 흥성시킬 재목으로 촉망되었다. 유학의 경전(經典)에 통달하고 시(詩)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용맹스럽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武藝)에도 능했다. 
청년시절(1366), 공은 아우인 태조와 함께 아버님 환조대왕을 보필하여 원나라로부터 쌍성(雙城) 지역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누차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를 토벌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359년(고려 공민왕 8)에 홍건적(紅巾賊)이 압록강을 건너와 노략질을 하자 이를 격파하여 2등 공신이 되었고, 1361년 2차 침입 때는 내부령(內府令: 종3품)으로서 안우(安祐) 등과 함께 박주(博州)에서 홍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다음 해에 수도인 개경(開京)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1363년에 또다시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이 무렵 공은 그간의 훈공(勳功)에 의해 척산군(陟山君)에 봉군(封君)되었다.
1375년(고려 우왕 1) 원제(元帝)가 고려 국왕으로 임명한 심왕(瀋王) 모자(母子)가 반역자 김의(金義)의 무리를 거느리고 이미 신주(信州)에 도착하였다는 보고에 따라 국방경비를 강화할 때 동지밀직사(同知密直使)였던 공은 원수(元帥)가 되어 서북 방어의 임무를 담당해, 반도(叛徒)들을 막아내었고, 1377년(고려 우왕 3)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상원수(上元帥)인 나세(羅世)와 함께 이를 격파하였다. 1380년(고려 우왕 6) 3월 왜구가 또 다시 광주(光州)·화순(和順)·능성(綾城: 능주)을 침범하자 원수로서 나가 막아냈다. 
동년 8월 왜적이 배 500척을 진포(鎭浦: 군산의 옛 이름.)에 매어 두고 양광(楊廣: 충청) · 전라·경상 3도의 연해에서 노략질하자 공은 양광도순찰사(楊廣都巡察使)가 되어 출전, 변안열(邊安烈)과 함께 3도도순찰사인 태조를 도와 남원(南原) 운봉(雲峰)에 이르러 대승하였다. 유명한 이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공은 많은 포로와 말 1,600여 필을 포획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등 큰 전과(戰果)를 올렸다. 
이때의 수훈(樹勳)으로 공은 다시 추충절의보리공신(推忠節義輔理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고려조의 가장 높은 위계(位階)인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완산군(完山君)으로 개봉되었다.
三韓故國身何在(삼한고국신하재)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디인가. 
地下願從伯仲遊(지하원종백중유) 죽어 지하에서 태백(泰伯)․중옹(仲雍)을 만나 놀고 싶 어라. 
同處休云裁處異(동처휴운재처이) 같은 처지에서 처신함이 다르다 말 마오,
荊蠻不必海桴浮(형만부필해부부)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목 띄울 일 없어라.
이 시에서 공은, 주나라 고공단보(古公壇父)의 장자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왕위를 막내 동생 계력(季歷: 곧 주문왕의 아버지)에게 양보하고 뗏목을 저어 형만(荊蠻) 땅으로 망명했던 고사(故事)를 인용하며, 그들은 그랬을지언정 자신은 단호히 목숨을 끊어버림으로써 정명(正命)을 다하겠다는 비장한 결의(決意)를 보이고 있다. 
이 시는 오랜 세월 동안 절명시(絶命詩) ․ 필명시(畢命詩) 등으로 이름만 전해왔으나, 1908년(순종 2) 18세 종손 철재(轍在)가 순종(純宗)의 윤허를 받아 공의 묘소를 보수할 때 발견된 지석(誌石: 죽은 사람의 성명·생몰 연월일· 행적·무덤의 좌향(坐向) 등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묻는 돌 또는 도판(陶板).)에 음각(陰刻)되어 있어서 그 구체적 내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완풍대군파 학술위원회에서는 위의 시를 정명시(正命詩)로 명명(命名)한 뒤 2004년 10월 서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그 깊은 의미를 분석한 바 있다. 
공은 이미 천명(天命: 하늘로부터 받은 목숨)의 소재를 인식했기에, 새 왕조의 도래가 필연적이고 그것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지만, 스스로는 고려의 신하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을 죽음으로써 실천하였다. 강효석(姜斅錫)의 역사서 『대동기문(大東奇聞)』이나 김형재(金亨在)의 『대동소학(大東小學)』은 공을 여말의 대표적 수절신(守節臣)으로 소개하며 높은 절개를 찬양한 바 있지만, 공의 자결(自決)은 단순한 수절(守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곧, 정명사상(正命思想)이 발현된 결단이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구현이었다는 데 그 진정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태조는 등극(登極)한 후에 백형(伯兄)인 공을 완산백(完山伯)으로 추봉하고 `양평(襄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공의 거룩한 행적은, 그러나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들에 의해 기휘(忌諱: 꺼리고 피함)되어 자손들에 의해 구전(口傳)되거나 야사서(野史書)에 등재되었을 뿐, 정사(正史)에는 오를 수 없었고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도 어려웠다. 
1872년(고종 9)에 이르러서야 공은 완풍대군(完豐大君) 겸 영종정경(領宗正卿)으로 추증(追贈)되고, 자손들은 4세봉군(四世封君) 겸 종정경(宗正卿) 증직의 은전(恩典)을 입게 되었다. 영종정경(領宗正卿)이란, 조선 후기의 종친부의 명예 관직으로, 1869년(고종 6)에 처음으로 설치되어 왕의 아들들에게 봉작과 함께 주어졌으며, 품계(品階)는 정1품을 초월하는 무계(無階)이다. 
공의 묘소는 함흥시 북주 동면 경흥리 귀주동 정릉(定陵) 오른쪽 언덕에 있다. 「묘비문(墓碑文)」과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순종 때 왕실지친이었던 종정원경(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재완(載完)이 찬술하였다.
남북 분단으로 묘전에서 향사(享祀)를 올릴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긴 후손들은 1984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 장자(長子) 안소공의 묘역(墓域) 안에 흥경단(興慶壇)을 조성하여, 매년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세일제(歲一祭)를 봉행하고 있다. 
배위는 부부인(府夫人: 조선시대 외명부의 하나로 왕비의 어머니나 대군의 처에게 내린 칭호.) 남평 문씨(南平文氏)와 부부인 경주 김씨(慶州金씨)이다. 두 분은 고려조에 이미 대군의 작위(爵位)에 따라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진 바 있다. 남평 문씨는 문익점(文益漸 : 목화를 전래한 분)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안소공(安昭公) 양우(良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양도공(襄度公) 천우(天祐)이고, 딸은 중랑장(中郞將) 이인우(李仁雨)에게 시집갔다. 경주 김씨는 찬성사 용(鏞)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완남군(完南君) 조(朝)·완녕군(完寧君) 서(曙)이고, 딸은 생원(生員) 노신(盧愼), 승지(承旨) 춘당(春堂) 변중량(卞仲良)에게 시집갔다. 
흥경단(興慶壇)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조 ․ 태종실록, 승정원일기, 동사강목(안정복), 포은집(정몽주), 춘당집(변중량), 완산실록, 대동기문(강효석), 전주이씨완풍대군파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인물전승3, 완풍보감(완풍대군파 학술위원회) 등.
주요 논문
이원계 문헌 전승의 연구(이창헌, 1998, 동국대 발표, 『고려인물전승3』에 수록.)
여말 선초 완풍대군 이원계의 생애와 사상(이현중, 2000, 동서철학연구 20)
완풍대군 이원계 공의 절명성인시에 관한 인생경영론적 연구(이훈섭, 2001, 한국전통상학연구 18) 
완풍대군과 부해시(송백헌, 2004, 충북대 『개신어문연구』 제22집)
완풍대군 자손 사세봉군 일람표(完豊大君 子孫 四世封君 一覽表)
派始祖 曾孫
완풍대군 원계
(完豊大君 元桂)
완원부원군 양우
(完原府院君 良祐)
선평군 흥발
(善平君 興發)
경명군 계인(慶明君 繼仁)
경회군 효인(慶會君 孝仁)
경춘군 승인(慶春君 承仁)
선성군 흥제
(善城君 興濟)
청천군 효련(淸川君 孝連)
청부군 효충(淸富君 孝忠)
청안군 효신(淸安君 孝信)
청주군 효숭(淸州君 孝崇)
청해군 효생(淸海君 孝生)
청풍군 효례(淸風君 孝禮)
청하군 효지(淸河君 孝智)
선산군 흥로
(善山君 興露)
진춘군 을충(晉春君 乙忠)
진원군 병충(晉原君 丙忠)
진해군 정충(晉海君 丁忠)
진천군 말충(晉川君 末忠)
완산부원군 천우
(完山府院君 天祐)
여양군 굉
(驪陽君 宏)
월성군 명인(月城君 明仁)
월평군 종인(月坪君 宗仁)
월산군 경인(月山君 敬仁)
월풍군 수인(月豊君 壽仁)
여성군 완
(驪城君 完)
월선군 효명(月善君 孝明)
여흥군 선
(驪興君 宣)
의선군 동(義善君 仝)
예선군 정(禮善君 貞)
완남군 조(完南君 朝) 여안군 군실
(驪安君 君實)
진릉군 세문(晉陵君 世門)
완령군(完寧君)
서(曙=백온伯溫)
여강군 영석
(驪江君 永錫)
춘성군 봉중(春城君 奉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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