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司果) 공 세원(世元)의 장남이다.
자(字)는 우선(羽仙), 호는 쌍매헌(雙梅軒)이다.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등 당내 명사(名士)들과 도의(道義)로써 교제(交際)하였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후에는 사진(仕進: 벼슬길에 나아감.)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여 학문(學問)과 술과 바둑으로 지내었다. 향년(享年)은 81세이다. 향년과 배위 윤씨의 봉작(封爵)으로 보아, 공은 만년(晩年)에 조정으로부터 정3품 통훈대부 이상의 관계(官階)를 받은 듯하다.
배위(配位)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尹氏)는 호조참판 어초은(漁樵隱) 효정(孝貞)의 따님이다. 윤효정(尹孝貞)은 형조판서(刑曹判書) 윤의중(尹毅中)의 조부(祖父)이며, 시조문학의 대가(大家)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고조(高祖)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우리치(遇李峙)에 있다.
공은 1954년 전남 신안군 지도읍의 봉산사(鳳山祠)에 양도공 및 아우 난헌(蘭軒) 공과 함께 모셔졌다.
친했던 벗 임억령(林億齡)의 『석천시집(石川詩集)』에는 7언율시「贈羽仙李上舍鶴(증우선이상사학)(字가 羽仙인 이 진사 鶴에게 드림)」등 몇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증 우선 이상사 학」은 해남 처가(妻家)에 와 있던 쌍매헌 공이 장차 북쪽(영광) 집으로 돌아간다 하므로, 임 석천이 작별에 앞서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이다.
君爲明月松間物(군위명월송간물) 그대는 밝은 달 소나무 사이 학과 같은 인물
我是梅花樹下僧(아시매화수하승) 나는 매화 나무 아래 승려 같은 존재
共把寒醅評水石(공파한배평수석) 둘이서 찬 술잔 기울이며 산수 정경 평하노니
澄江古峽亂蒼藤(징강고협난창등) 맑은 강 오래된 계곡에는 푸른 등넝쿨 어지럽네.
梅花嶺外客情催(매화령외객정최) 매화는 고개 밖 나그네의 회포를 재촉하는데
酌以山城竹葉盃(작이산성죽엽배) 산성의 댓잎 잔에 술 따라 그대에게 권하네.
君到故園花政發(군도고원화정발) 그대 고향 땅엔 바야흐로 꽃이 한창 피었으리니
一枝須寄小童回(일지수기소동회) 한 가질랑 꺾어다가 아이 편에 보내주구려.
사과 공 세원의 2남이다.
자(字)는 서선(瑞仙), 호는 난헌(蘭軒)이다. 천품(天稟: 나면서부터 타고난 기품)이 영매(英邁: 슬기롭고 호매함)하고 문예(文藝)가 뛰어났다.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나, 을사사화 이후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난초(蘭草)를 기르며 낙(樂)을 삼았다.
배위(配位)는 영인(令人) 부안 한씨(扶安韓氏)로 참의(參議) 겸(謙)의 따님이다. 계배는 영인(令人) 영광 김씨로 생원(生員) 구연(九淵)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우리치(遇李峙)에 있다.
1954년, 은덕불사(隱德不仕: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음.)한 덕행을 추모한 후손과 사림(士林)들에 의해 공은 전라남도 신안군(新安郡) 지도읍(智島邑) 자동리(自東里)에 소재하는 봉산사(鳳山祠)에 모셔졌다. 매년 음력 3월 11일이 제사일이다.
사과 공 세원의 3남이다.
자(字)는 익선(翼仙), 호는 남파(南坡) 또는 지헌(芝軒)이다. 천성(天性)이 인후(仁厚)하고 재주가 빼어났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였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밭 갈고 독서(讀書)하기로써 즐거움을 삼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는 증 숙부인(淑夫人) 청송 심씨(淸松沈氏)이다.
묘소는 무안군(務安郡) 일로읍(一老邑) 광암(光岩) 왼쪽 언덕[左麓]에 있다.(設壇)
사과공 세원의 4남이다.
초휘(初諱)는 연(槤)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을 지내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경립(景立)의 따님이다.
묘소는 묘량면 당산 산소동에 있다.
쌍매헌 공 학(鶴)의 장남이다.
자(字)는 화숙(和叔), 호는 사매당(四梅堂)이다. 명종조에 생원(生員)이 되어서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다가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조짐을 보고 귀향(歸鄕)하였다. 예학(禮學)을 연구하여 『가례부주(家禮附註: 가정의례에 대해 상세한 주석을 단 책)』를 저술(著述)하였고, 임진왜란(1592) 때는 71세의 고령(高齡)임에도 장성(長城) 남문창의(南門倡義)에 여러 아드님들을 이끌고 수창(首倡: 우두머리가 되어 제일 먼저 주창(主唱)함.)으로 가담하여 공(功)을 세웠다. 이어 영광(靈光)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추대되어 휘하 54현과 함께 왜적(倭敵)을 막았다. 향년(享年)은 84세이다.
배위는 의인(宜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참봉(參奉) 구연(九淵)의 따님이다. 참봉 공이 후사(後嗣)가 없어 사위인 사매당으로부터 외(外) 17대손인 규헌(奎憲) 대에 이른 오늘날까지 외손(外孫) 봉사(奉祀)가 이루어지고 있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당산(堂山) 산소동(山所洞)에 있으며, 묘장서원(畝長書院)과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 영광 수성사(守城祠)에 모셔졌다.
쌍매헌 공 학(鶴)의 2남이다.
자(字)는 중초(仲初),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타고난 인품(人品)이이 순수(純粹)하고 효행이 남다르며, 총명이 유난히 뛰어났으므로, 스승인 외숙(外叔) 귤정(橘亭) 공 윤구(尹衢)에게 특별한 아낌과 기대를 받았다. 명종조에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양과(兩科)에 급제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서애 유성룡, 오리 이원익, 수우당 최영경 등 당대 명인(名人)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었다. 선조 때 조정에 천거되어 소촌도(召村道) 찰방(察訪)에 부임하였다가 송강(松江) 정철(鄭澈)과의 사감(私感)으로 기축옥사(己丑獄事: 선조 22년, 1589년)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옥사(獄死)하였다. 사림(士林)의 발의(發議)로 1603년 신원(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되고 복관(復官)되었다.
배위(配位)는 두 분으로 초취(初娶)는 공인(恭人) 금성 나씨이니,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선생의 따님이다. 재취(再娶)는 공인(恭人) 이천 서씨(利川徐氏)이니, 현감(縣監)을 지낸 주(註)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우리치(遇李峙) 쌍매헌공 묘소 아래에 있다. 묘장서원(畝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쌍매헌 공 학(鶴)의 3남이다.
자(字)는 계명(季鳴), 호는 한천당(寒泉堂)이다. 사매(四梅)ㆍ만취(晩翠) 두 형님과 더불어 외숙(外叔) 귤정(橘亭) 공 윤구(尹衢) 문하(門下)에서 배웠는데, 고금(古今)에 통달치 않은 바가 없었으며, 6년 여묘(廬墓: 상제가 무덤 근처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의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뭇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당대 지역 인사(人士)인 신응망(申應望)의 유고(遺稿)에 공을 칭송한 "6년의 여묘(廬墓) 기간 동안 한 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다.[六年居廬 一不下家(육년거려일불하가)]"라는 구절이 전한다.
당쟁(黨爭)의 화(禍)를 예견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던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매 모속 도유사(募粟都有司)로서 영광 법성포에 곡식을 모아 뱃길로 왕의 행재소, 고경명(高敬命)ㆍ곽재우(郭再祐)의 의병소에 보내고 장성남문 창의(倡義) 및 영광 수성(守城)에도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일찍이 효행(孝行)으로 참봉(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난후(亂後)에 순무사(巡撫使) 한준겸(韓浚謙)이 특히 공로(功勞)를 천거하였으나 여러 벼슬을 사양하였다. 왕명(王命)을 거역할 길 없어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에 부임하였으나 3개월만에 귀향(歸鄕)하여 학문(學問)과 덕(德)을 닦았다.
배위(配位)는 공인(恭人) 금성 나씨로,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선생의 손녀(孫女)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우리치(遇李峙) 쌍매헌 공 묘소 아래에 있다. 묘장서원(畝長書院)과 장성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 영광 수성사(守城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사매당 공 응종(應鍾)의 장남이다.
자(字)는 자경(子敬)이며,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내었다. 임진왜란 때 사매당을 도와 창의대열에 참여, 군성(郡城)을 지켰다. 향년은 74세이다.
배위는 의인(宜人) 청안 이씨(淸安李氏)이니, 장성(長城)의 유명한 성리학자 석탄(石灘) 이기남(李箕南)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당산(堂山) 산소동(山所洞) 사매당 묘소 아래에 있다.
공의 후손 중에서 효자(孝子), 학자(學者), 과거급제자 등 훌륭한 인물이 매우 많이 배출되었다.
사매당 공 응종(應鍾)의 2남이다.
자는 자수(子守), 호는 모헌(慕軒)이다. 임진왜란 때 사매당을 도와 창의대열에 참여하여 선조(宣祖)가 파천(播遷)한 의주(義州)와 광주의병소(光州義兵所)에 많은 의병(義兵)과 병기(兵器)ㆍ군량(軍糧)을 조달하였다. 선조(先祖)의 공훈(功勳)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어 출사(出仕)하였고, 후일 주부(主簿) 벼슬을 지냈으므로 후세에 주부 공으로 일컬어졌다.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고흥 유씨(高興柳氏)이며, 묘소는 영광군 대마면(大馬面) 화산(花山) 동록(東麓) 신의동(新衣洞) 마명당(馬明堂)에 있다.
후손 중에 저명한 인물로, 삼화주택회장을 지낸 유신(有信) 종현과 국사편찬 위원회(編纂委員會) 위원장을 지낸 현종(鉉淙) 종현이 있다. 두 분 모두 각별한 위선심(爲先心)으로 종사에 힘을 다하였으며, 특히 유신 종현은 완풍대군 파종회장과 양도공재경종친회장으로 봉무(奉務)하던 중 많은 사재(私財)를 쾌척하여 종사를 반석(盤石) 위에 올리는 데 기여하였다.
사매당 공 응종(應鍾)의 3남이다.
자(字)는 자정(子正), 호는 칠매(七梅), 혹은 우헌(愚軒)이다. 총명(聰明)이 탁월하고 사장(詞章)이 날로 진보하여 선조 무자년(戊子年: 1588)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임란(壬亂) 때 사매당을 도와 장성남문창의에 가담하였고, 영광으로 돌아와서 수은(睡隱) 강항(姜沆)과 함께 장서기(掌書記)ㆍ폐막관(弊官)의 직책으로 고을을 지켰다. 또, 숙부님 한천당(寒泉堂)을 따라서 의곡도유사(義穀都有司)가 되어 곡식을 모집하여 법성포를 통해 선조가 계시는 행재소(行在所)로 보내고, 의병과 양곡, 기계 등을 모집하여 광주(光州) 의병소와 곽재우(郭再祐) 진중(陣中)에 보냈다. 선조 30년(1597) 정유년에 천거에 의해 오수도찰방(鰲樹道察訪)에 제수되어 왜적을 막다가 왜적이 물러난 뒤 바로 귀향하였다. 뒤에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임란 때의 공로로 서거(逝去) 후 묘장서원(畝長書院) 및 장성의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와 영광 수성사(守城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배위는 숙인(淑人) 남원 양씨(南原梁氏)이니 별제(別提) 홍도(弘度)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구수면(九岫面: 백수면) 범현동(帆懸洞)에 있다.
공의 3남 성(: 1594~1653, 호는 梅軒)은 인조조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후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고 청의 연경(燕京)에 사신(書狀官)으로 파견되어 「연행일기(燕行日記)」를 남겼으며, 후일 벼슬이 청도군수(淸道郡守)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 정3품)에 이르렀다.
사매당 공 응종(應鍾)의 4남이다.
자(字)는 자현(子顯)이며, 호는 죽헌(竹軒)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성품이 굳세고 과감하며 기절(氣節)이 있었다. 임란 때 사매당을 모시고 장성(長城) 남문창의(南門倡義)에 가담하여 활약하였으며, 영광에 돌아와 수성대장(守城大將)이 된 사매당 휘하에서 대장군관(大將軍官)이 되어 왜적을 막아낼 방비를 하였다. 또, 의병(義兵)을 조련하고 의곡(義穀)과 병기(兵器)를 모아 선조가 파천(播遷)해 계시는 의주행재소(義州行在所) 및 각처(各處) 의진(義陣)에 조달하였다. 이 같은 공로로 공은 후일 장성의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와 영광 수성사(守城祠)에 모셔졌다.
배위는 의인(宜人) 금성 나씨(錦城羅氏)이니, 대사헌(大司憲)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선생의 증손녀이다.
묘소는 영광군 불갑면(佛甲面) 우곡리(牛谷里) 산 32번지에 있다.
사매당 공 응종(應鍾)의 5남이다.
자(字)는 자호(子豪)이며, 호는 취옹(醉翁)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총명이 뛰어나고 기우(氣宇: 기개와 도량)가 호매(豪邁: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남.)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친척이나 벗 가운데 생활이 어려운 이가 있으면 재물을 아끼지 않고 구휼(救恤)하였으며, 자질(子姪: 아들과 조카)이나 인근의 젊은이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간곡하게 타일러 깨우쳐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컫기를'우리 동방(東方)의 군자(君子)'라 하였다. 당시 극심한 당쟁(黨爭)과 간신(奸臣)들의 발호를 보면서 출세(出世)를 단념하고 경사(經史)에 전심(專心)하였으며, 임천(林泉: 산수ㆍ자연)에 뜻을 부쳐 거문고와 술로 시름을 달래었다.
배위는 의인(宜人) 진주 정씨(晋州鄭氏)로, 찰방(察訪) 함일(咸一) 공의 따님이다.
묘소는 장성군(長城郡) 외서면(外西面: 현 森西面) 가고치(枷鼓峙)에 있다.
공의 후손으로서 유명한 분으로는 고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흥선대원군의 지우(知遇)를 받아 형조참판에 오른 충간공(忠簡公) 윤수(潤壽)가 있다.
1. 문관(文官) 품계(品階) 일람
정일품(正一品) :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종일품(從一品) : 숭록대부(崇祿大夫), 숭정대부(崇政大夫)
정이품(正二品) : 정헌대부(正憲大夫), 자헌대부(資憲大夫)
종이품(從二品) : 가의(嘉義)ㆍ가정대부(嘉靖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
정삼품(正三品) : 통정대부(通政大夫)-이상 당상관(堂上官)
통훈대부(通訓大夫)-이하 당하관(堂下官)
종삼품(從三品) : 중직대부(中直大夫), 중훈대부(中訓大夫)
정사품(正四品) : 봉정대부(奉正大夫), 봉렬대부(奉列大夫)
종사품(從四品) : 조산대부(朝散大夫), 조봉대부(朝奉大夫)
정오품(正五品) : 통덕랑(通德郞), 통선랑(通善郞)
종오품(從五品) : 봉직랑(奉直郞), 봉훈랑(奉訓郞)
정육품(正六品) : 승의랑(承義郞), 승훈랑(承訓郞)
종육품(從六品) : 선교랑(宣敎郞), 선무랑(宣務郞)
-이상 참상관(參上官)
정칠품(正七品) : 무공랑(務功郞) -이하 참하관(參下官)
종칠품(從七品) : 계공랑(啓功郞)
정팔품(正八品) : 통사랑(通仕郞).
종팔품(從八品) : 승사랑(承仕郞).
정구품(正九品) : 종사랑(從仕郞).
종구품(從九品) : 장사랑(將仕郞).
2. 무관(武官) 품계(品階) 일람
정일품(正一品)으로부터 從二品(종이품)까지는 동반 관직과 같다.
정삼품(正三品) : 절충장군(折衝將軍)-당상관(堂上官)
어모장군(禦侮將軍)-당하관(堂下官)
종삼품(從三品) : 건공장군(建功將軍), 보공장군(保功將軍)
정사품(正四品) : 진위장군(振威將軍), 소위장군(昭威將軍)
종사품(從四品) : 정략장군(定略將軍), 선략장군(宣略將軍)
정오품(正五品) : 과의교위(果毅校尉), 충의교위(忠毅校尉)
종오품(從五品) : 현신교위(顯信校尉), 창신교위(彰信校尉)
정육품(正六品) : 돈용교위(敦勇校尉), 진용교위(進勇校尉)
종육품(從六品) : 여절교위(勵節校尉), 병절교위(秉節校尉)
-이상 참상관(參上官)
정칠품(正七品) : 적순부위(迪順副尉) -이하 참하관(參下官)
종칠품(從七品) : 분순부위(奮順副尉)
정팔품(正八品) : 승의부위(承義副尉)
종팔품(從八品) : 수의부위(修義副尉)
정구품(正九品) : 효력부위(效力副尉)
종구품(從九品) : 전력부위(展力副尉)
3. 부군(夫君)의 품계에 따른 부인(夫人) 봉작 명칭 일람
정1품(종1품 포함) - 정경부인(貞敬夫人)
정2품(종2품 포함) - 정부인(貞夫人)
정3품(당상관) - 숙부인(淑夫人)
정3품(당하관), 종3품 - 숙인(淑人)
정4품(종4품 포함) - 영인(令人)
정5품(종5품 포함) - 공인(恭人)
정6품(종6품 포함) - 의인(宜人)
정7품(종7품 포함) - 안인(安人)
정8품(종8품 포함) - 단인(端人)
정9품(종9품 포함) - 유인(孺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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