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도 약전
완산부원군 양도공 천우(天祐) (1354~1417)
양도공 묘소 근경
완풍대군의 제2남으로 어머님은 남평 문씨(南平文氏)이니,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의 따님이다.
소시(少時)부터 총명하고 무예(武藝)가 출중하여 숙부인 태조대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누차 왜구(倭寇)를 소탕하여 큰 공을 세웠다. 조선 개국공신, 정종조 정사(定社)공신, 태종조 좌명(佐命)공신이 되고, 병조ㆍ이조판서ㆍ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을 역임하였으며,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태종의 지우(知遇: 남이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을 알고 잘 대우함.)를 입었으나 부귀영화를 사양하고 은퇴하였으므로, 그를 기리기 위해 왕이 하사한 매 그림 이응도[二鷹圖]이 지금도 종가(宗家)에 보존되고 있다. 세종 6년(1424) 태종묘정(太宗廟庭)에 당대 5공신의 일인(一人)으로 배향(配享)되었고, 광해(光海) 8년(1616) 병진년에 묘장서원(畝長書院: 당시는 畝長影堂)에 모셔졌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니,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언니이다. 또 한 분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황보 씨(皇甫氏)로 여성군(驪城君), 여흥군(驪興君)의 어머님이다. 황보씨는 세종 23년(1441) 11월 10일 돌아가셨는데, 세종은 이분이 문종(文宗)의 동궁(東宮) 시절, 예의범절을 가르친[阿保] 은혜가 있다고 하여 특별히 예장(禮葬: 지금의 국장)을 명(命)한 바 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일산의 성석동(城石洞) 산(山) 203번지 학령산(鶴翎山)에 모셔졌으니, 묘소 일대(一帶) 산과 토지(土地)는 태종(太宗)이 내린 땅이다.
광무 6년(1902) 공의 19대 종손 매정(梅庭) 공 의갑(義甲)이 청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던 송병선(宋秉璿: 文忠公, 을사조약 때 殉國)이 「신도비문(神道碑文: 종2품 이상의 관리의 무덤 근처의 큰 길가에 세우던 비) 을 찬술하였다
여양군 굉(宏) (?~1417)
여양군 묘소
양도공의 장남(長男)이며, 어머님은 정경부인(貞敬夫人)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종친(宗親)으로서 처음 원윤(元尹: 왕족에게 수여되는 품직 정2품으로 君과 같음)에 봉해지고, 태종 12년(1412) 삼군도총부(三軍都摠府)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종2품)에 이르렀다. 고종 9년(1872)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여양군(驪陽君) 겸 종정경(宗正卿)에 추봉되었다. 불행히 일찍 돌아가셔서 포부(抱負)를 다 펴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배위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따님이니, 곧 정종비(定宗妃)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동생이다. 이 할머님이 슬하 4형제를 데리고 친정(親庭)의 별장(別莊)이 있는 전남 담양(潭陽: 정확히는 潭陽邑 栢洞里)에 처음 내려왔다.
묘소는 고양(高陽) 선산(先山)의 양도공 묘소 아래 있었으나, 실전(失傳: 묘지나 고적 따위에 관련되어 전하여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됨.)되어, 전남 담양군 월산면(月山面) 홍암(紅巖) 능동(陵洞)에 설단(設壇)하였다. 신단(神壇)에는 여양군 신위단비(驪陽君神位壇碑)가 세워져 있는데, 글은 유명한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였던 안동후인(安東後人) 대사성(大司成) 김복한(金福漢)이 찬술(撰述)하였다. 현재의 신위단비는 1978년 20대손 대연(大淵) 종현이 양도공 신도비 건립에 이어 개수(改竪: 다시 세움)한 것이다. 두전(頭篆)은 종가 대표 동혁 종현이 쓰고, 본문 글씨는 중국 산동성 출신 서예가 손두남이 썼다.
여성군 완(完)
완산부원군 양도공의 2남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황보 씨(皇甫氏)이다.
공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내었고, 고종 9년(1872) 임신년에 추봉(追封)과 종정경(宗正卿) 추증(追贈)의 은전(恩典)을 입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세종조에 종친(宗親)으로서 중추원(中樞院) 등에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등으로 봉직(奉職)한 때의 행적을 다룬 기사(記事)가 나와 있다.
배위(配位)는 병화(兵禍: 전쟁으로 인한 화재.)에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으므로, 고증(考證)을 요한다.
묘소는 아버님 완산부원군 묘소가 있는 고양(高陽) 선산(先山)에 모셔져 있으며, 후손(後孫)이 묘소 아래 마을에 지금까지 세거(世居)하고 있다.
여흥군 선(宣)
보첩(譜牒)에 판서(判書)를 지내었다고 되어 있으나, 모든 기록이 병화(兵火)에 실전(失傳)되었으므로 실직(實職)인지는 알 수 없다. 고종 9년(1872) 임신년(壬申年)에 추봉과 종정경(宗正卿) 추증(追贈)의 은전을 입었다.
배위(配位)는 병화(兵禍)에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으므로, 고증(考證)을 요한다.
묘소는 역시 고양(高陽) 선산(先山)의 양도공 묘소 경내(境內)에 모셔져 있다.
월성군 명인(明仁)
월성군 묘소
여양군의 장남이다. 한양(漢陽: 지금의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돈령부(敦寧府) 주부(主簿) 등을 지냈으나, 영달(榮達)의 뜻을 버리고, 세종조에 어머님 정부인 김씨(貞夫人 金氏)를 모시고 담양(潭陽)에 내려왔다. 사미정(四美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유유자적(悠悠自適) 하였는데, 검소(儉素)한 태도와 효도ㆍ우애의 극진함으로 부민(府民)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증손(曾孫) 쌍매헌 학(鶴)의 벗이었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사미정(四美亭)을 읊은 시가 『하서집(河西集)』에 나온다. 고종 9년(1872)에 호조참판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종정경(宗正卿)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남원 양씨(南原梁氏)로 대방군(帶方君) 명우(明遇)의 따님이다.
묘소는 담양군 월산면(月山面) 홍암리(紅巖里) 능동(陵洞)의 어머님 정부인(貞夫人) 산소 아래에 모셔졌다. 묘역에는 규장각 직각 송규헌(宋奎憲)이 찬술한「신도비문(神道碑文)」으로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2007년 이를 국역(國譯)한 비석을 묘전에 세웠다. (후손 창헌 역, 종회장 용주, 창연 세움.)
월성군 명인(明仁)
월평군 영정
월평군 묘소
여양군(驪陽君)의 2남으로, 역시 한양(漢陽)에서 출생하였다.
조정의 부름을 받아 단종 3년(1454)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서 우영호군(右領護軍)을지낼 때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를 호위한 공이 커 수충위사동덕(輸忠衛社同德) 좌익공신(佐翼功臣)의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제수되었으며, 세조 4년(1458)에는 화상(畵像) 및 포총교지(褒寵敎旨)를 받았으며 다음은 『세조실록』(세조 1년 12월 27일)에 실려 있는, 공의 공적을 기록한 「원종공신교서(原從功臣敎書)」의 번역문이다.
공(功)을 기록하고 상(賞)을 주는 것은 나라의 아름다운 법이다. 내가 부족한 덕(德)으로 외람되게 대위(大位)에 앉았는데, 잠저(潛邸)에서의 어려울 때를 회고하니, 덕(德)이 같은 신하들이 전후좌우에서 과인(寡人)을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나의 동렬(同列)로서, 혹은 나의 요좌(僚佐)로서 혹은 가까운 친척으로서 혹은 오래 수종(隨從)하던 사람으로서, 혹은 내가 중국에 갈 때에 발섭(跋涉: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길을 감)의 노고를 함께 하였고, 혹은 정난(靖難)에 참여하여 방위(防衛)에 힘쓰고, 아래로 복예(僕隷: 노비)에 이르기까지 힘을 다하였으니, 모두 원종(原從)의 공(功)이 있어서 오늘의 아름다움에 이르렀으니, 내가 감히 잊겠는가? 마땅히 먼저 포상(褒賞)하는 법을 보여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아니하는 의리를 굳게 하려고 한다. 너희 의정부에서는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아서 마땅히 빨리 거행할 것이다.(후략)
선조 38년(1605)에 병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고종 9년(1872)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종정경(宗正卿) 월평군(月坪君)에 추봉되고, 부조지전(不之典)을 명(命)받았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판서(判書) 숙의 따님이다.
후손들은 사우(祠宇: 사당)를 담양 창평면(昌平面)의 궁암(弓岩)에 세워 춘추(春秋)로 향사(享祀)해 오다가 1990년 노후(老朽)된 사우(祠宇)를 바로 옆 새로운 자리에 신축(新築)하여 옮겼다.
양위(兩位)의 유택(幽宅)은 당초 담양군 월산면 홍암리 능동 선산(先山)에 있었으나, 거듭되는 병화(兵火)와 재난(災難)으로 실전(失傳)되었으므로 고종 10년(1873)에 12대손인 진사(進士) 이필(以)이 주관하여 어머님 묘소의 백호등(白虎嶝)에 단(壇)을 쌓아 입비(立碑)하고 1977년 후손들이 묘역(墓域)을 넓혀 새로 단장하였다.
부조묘(不廟)는 담양군 수북면(水北面) 고성리(古城里) 궁암(弓巖)에 있다.
후손 중 저명한 이로 대로(大老)와 낙연(洛淵) 종현이 있다. 대로 씨는 전남도교육위원회 의장을 역임한 바 있는 전남 교육계의 원로로, 유명 탤런트 이효춘(李孝春)의 부친이기도 하다. 낙연 씨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거친 3선 의원으로 2009년 1월 현재 국회 농수산분과위원장에 재임 중이다.
월산군 경인(敬仁)
여양군(驪陽君)의 3남이다.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을 지낸 후, 충신들이 피살(被殺)되고 단종(端宗)이 선위(禪位)해야 하는 어지러운 시국(時局)을 개탄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 주자학(朱子學)에 몰두하며 청절(淸節)을 지켰다.
고종 9년(1872)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월산군(月山君) 겸 종정경(宗正卿)에 추봉(追封)되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청풍 김씨(淸風金氏)로 보국(輔國)의 따님이다.
묘소는 실전(失傳)되어 전남 담양군 대덕리(大德里) 만덕산(萬德山) 청운(靑雲)에 초혼(招魂: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 성분(成墳)하여 새로이 조성하였다.
월풍군 수인(壽仁)
월풍군 묘소
여양군(驪陽君)의 4남이다.
상호군(上護軍)과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다. 도정은 조선 시대에, 종친부, 돈녕부, 훈련원에 속하여 종실, 종친, 외척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정3품 벼슬이다. 고종 9년(1872) 가선대부 형조참판에 증직(贈職)되고, 월풍군(月豊君) 겸 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덕행(德行)으로 전남 영광군 법성면 지장사(芝庄祠)에 모셔졌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현감(縣監) 영춘(永春)의 따님이다.
묘단(墓壇)은 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암리 홍암에 있다.
사맹 공 효상(孝常)
월성군의 장남이다.
선조(先祖) 양도공의 공훈으로 충의위(忠義衛) 사맹(司猛)을 지냈다. 소년시절부터 출중한 문재(文才)가 있어 20세 전에 이미 향시(鄕試)에 급제(及第)하였으나, 과거(科擧)를 폐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전남 담양에서 처향(妻鄕)인 영광(靈光) 묘장(畝長)으로 이거(移居)하여 터를 정한 입향조(入鄕祖)이다.
양도공의 종통(宗統)을 바로잡고자 진력(盡力)했던 일이 『성종실록(成宗實錄)』에 나타나 있다.
배위는 의인(宜人)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진사(進士) 증 공조참판 시지(時止)의 따님이다. 장성(長城) 삼계면(森溪面: 당시에는 靈光에 소속되었음.)에서 태어났으며, 오누이 관계였던 이윤종(李胤宗)은 병조참판까지 지낸 명사(名士)였다.
묘소는 영광군(靈光郡) 묘량면(畝良面) 당산(堂山) 산소동(山所洞)에 있다.
병절교위 공 효강(孝綱)
병절교위 공 묘소
월성군의 2남이다.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어 병절교위(秉節校尉) 부사과(副司果)를 지내었다. 종후손(從後孫)이자 양도공 종손(宗孫)인 용연(龍淵) 공이 묘갈명(墓碣銘: 묘비에 새긴 글.)을 찬술하였다.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진주 정씨(晋州鄭氏)로 참봉(參奉) 현(玹)의 따님이다. 창신교위(彰信校尉) 세훈(世勳), 부호군(副護軍) 세빈(世彬), 세윤(世胤)의 세 아드님과 진사(進士) 박기(朴琪), 진사 변호(邊浩) 등 네 분 사위가 있다.
묘소가 병란(兵亂) 중에 실전(失傳)되어 월성군(月城君)묘소 아래에 설단(設壇)하였다.
주로 전남 함평(咸平)ㆍ무안(務安)ㆍ신안(新安)ㆍ담양(潭陽) 일대에 후손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후손중에 유명한 인사로 정치인 남규(南圭), 진연(震淵) 두 종현이 있다.
남규 종현은 제헌 의원(목포지역, 대한독립촉성회 소속)과 전남도지사, 5대 참의원 등을 지냈으며, 진연 종현은 3선 국회의원(9, 10, 12대 신민당, 영광 ㆍ함평지구)으로 활동하였다.
도정 공 효륜(孝綸)
월성군의 3남이다.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중년(中年)에 왕실(王室)의 친척으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니, 양(亮)의 따님이다.
도정공 양위(兩位)분의 묘소는 원래 선영(先塋)이 있는 홍암(紅巖) 능동(陵洞)에 모셨다가, 담양군(潭陽郡) 봉산면(鳳山面) 송산(松山) 후록(後麓) 효죽등(孝竹嶝)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사과 공 세원(世元)
사맹 공의 장남이다.
자는 춘경(春卿)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내었다. 연산(燕山) 기미년(1499)에 조정에 상소(上疏)하여 여양군께서 무고(巫蠱)당한 일을 설원(雪: 원통함을 풂.)하고, 드디어 이 문제를 완결하였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계인(繼仁)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당산(堂山) 산소동(山所洞) 사맹 공 묘 아래에 있다.
찰방 공 세형(世亨)
사맹 공의 2남이다. 자(字)는 형지(亨之)이다.(『司馬榜目』에 나옴.)
중종 2년(1507)에 병절교위(秉節校尉)로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58위] 진사(進士)가 되고, 통훈대부 행(行) 청단도 찰방(靑丹道 察訪: 지금의 큰 驛長)을 지내었다. 묘장[畝長: 지금의 묘량]에서 군남(郡南) 육창(六昌)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후손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배위 숙인(淑人) 김해김씨(金海金氏)는 참봉(參奉) 맹손(孟孫)의 따님이며, 좌의정 석공(碩恭)의 손녀이다.
묘소는 육창(六昌) 서원동(西圓洞)에 있다.
현손(玄孫)인 우봉(牛峰) 근(根)은 조부(祖父) 대(代)부터 광주(光州)에 거주하던 중 임란(壬亂)을 당해 앞장서 창의(倡義)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경현사(景賢祠)와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에 배향되었다. 또, 후손 소헌(疏軒) 종열(宗烈)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조조(正祖朝)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지냈다.
양촌 공 세림(世淋) (1469~1526)
사맹 공의 3남이다.
예종(睿宗) 1년에 태어나 중종(中宗) 21년에 서거(逝去)하였다.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상세한 행적(行蹟)을 알 수 없고, 호(號)가 양촌(陽村)으로 전한다.
배위는 의령 남씨(宜寧南氏)이며, 묘소는 담양 신촌(新村)에 있다.
좌랑 공 세창(世昌)
사맹 공의 4남이다.
자(字)는 천장(天長)이고,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돈령부(敦寧府) 주부(主簿)를 거쳐 호조좌랑(戶曹佐郞), 가선대부 용양위(龍瘍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내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현풍 곽씨(玄風郭氏)로, 치익(致翊)의 따님이다.
세행(世行) 공
사맹 공의 5남이다.
배위(配位)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구(球)의 따님이다. 묘소는 담양(潭陽)에 있다. 아드님은 진사(進士)인 수주(秀周) 한 분이 있다.
쌍매헌 공 학(鶴) (1497~1577)

사과(司果) 공 세원(世元)의 장남이다.
자(字)는 우선(羽仙), 호는 쌍매헌(雙梅軒)이다.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등 당내 명사(名士)들과 도의(道義)로써 교제(交際)하였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후에는 사진(仕進: 벼슬길에 나아감.)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여 학문(學問)과 술과 바둑으로 지내었다. 향년(享年)은 81세이다. 향년과 배위 윤씨의 봉작(封爵)으로 보아, 공은 만년(晩年)에 조정으로부터 정3품 통훈대부 이상의 관계(官階)를 받은 듯하다.
배위(配位)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尹氏)는 호조참판 어초은(漁樵隱) 효정(孝貞)의 따님이다. 윤효정(尹孝貞)은 형조판서(刑曹判書) 윤의중(尹毅中)의 조부(祖父)이며, 시조문학의 대가(大家)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고조(高祖)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우리치(遇李峙)에 있다.
공은 1954년 전남 신안군 지도읍의 봉산사(鳳山祠)에 양도공 및 아우 난헌(蘭軒) 공과 함께 모셔졌다.
친했던 벗 임억령(林億齡)의 『석천시집(石川詩集)』에는 7언율시「贈羽仙李上舍鶴(증우선이상사학)(字가 羽仙인 이 진사 鶴에게 드림)」등 몇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증 우선 이상사 학」은 해남 처가(妻家)에 와 있던 쌍매헌 공이 장차 북쪽(영광) 집으로 돌아간다 하므로, 임 석천이 작별에 앞서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이다.

君爲明月松間物(군위명월송간물)     그대는 밝은 달 소나무 사이 학과 같은 인물
我是梅花樹下僧(아시매화수하승)     나는 매화 나무 아래 승려 같은 존재
共把寒醅評水石(공파한배평수석)     둘이서 찬 술잔 기울이며 산수 정경 평하노니
澄江古峽亂蒼藤(징강고협난창등)     맑은 강 오래된 계곡에는 푸른 등넝쿨 어지럽네.
梅花嶺外客情催(매화령외객정최)     매화는 고개 밖 나그네의 회포를 재촉하는데
酌以山城竹葉盃(작이산성죽엽배)     산성의 댓잎 잔에 술 따라 그대에게 권하네.
君到故園花政發(군도고원화정발)     그대 고향 땅엔 바야흐로 꽃이 한창 피었으리니
一枝須寄小童回(일지수기소동회)     한 가질랑 꺾어다가 아이 편에 보내주구려.

난헌 공 난(鸞)

사과 공 세원의 2남이다.
자(字)는 서선(瑞仙), 호는 난헌(蘭軒)이다. 천품(天稟: 나면서부터 타고난 기품)이 영매(英邁: 슬기롭고 호매함)하고 문예(文藝)가 뛰어났다.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나, 을사사화 이후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난초(蘭草)를 기르며 낙(樂)을 삼았다.
배위(配位)는 영인(令人) 부안 한씨(扶安韓氏)로 참의(參議) 겸(謙)의 따님이다. 계배는 영인(令人) 영광 김씨로 생원(生員) 구연(九淵)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우리치(遇李峙)에 있다.
1954년, 은덕불사(隱德不仕: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음.)한 덕행을 추모한 후손과 사림(士林)들에 의해 공은 전라남도 신안군(新安郡) 지도읍(智島邑) 자동리(自東里)에 소재하는 봉산사(鳳山祠)에 모셔졌다. 매년 음력 3월 11일이 제사일이다.

지헌 공 곤(昆)

사과 공 세원의 3남이다.
자(字)는 익선(翼仙), 호는 남파(南坡) 또는 지헌(芝軒)이다. 천성(天性)이 인후(仁厚)하고 재주가 빼어났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였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밭 갈고 독서(讀書)하기로써 즐거움을 삼았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는 증 숙부인(淑夫人) 청송 심씨(淸松沈氏)이다.
묘소는 무안군(務安郡) 일로읍(一老邑) 광암(光岩) 왼쪽 언덕[左麓]에 있다.(設壇)

부정 공 령(鴒) (1520~1570)

쌍매헌 공 학(鶴)의 2남이다.
자(字)는 중초(仲初),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타고난 인품(人品)이이 순수(純粹)하고 효행이 남다르며, 총명이 유난히 뛰어났으므로, 스승인 외숙(外叔) 귤정(橘亭) 공 윤구(尹衢)에게 특별한 아낌과 기대를 받았다. 명종조에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양과(兩科)에 급제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서애 유성룡, 오리 이원익, 수우당 최영경 등 당대 명인(名人)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었다. 선조 때 조정에 천거되어 소촌도(召村道) 찰방(察訪)에 부임하였다가 송강(松江) 정철(鄭澈)과의 사감(私感)으로 기축옥사(己丑獄事: 선조 22년, 1589년)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옥사(獄死)하였다. 사림(士林)의 발의(發議)로 1603년 신원(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되고 복관(復官)되었다.
배위(配位)는 두 분으로 초취(初娶)는 공인(恭人) 금성 나씨이니,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선생의 따님이다. 재취(再娶)는 공인(恭人) 이천 서씨(利川徐氏)이니, 현감(縣監)을 지낸 주(註)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우리치(遇李峙) 쌍매헌공 묘소 아래에 있다. 묘장서원(畝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사매당 응종(應鍾) (1522~1605)

쌍매헌 공 학(鶴)의 장남이다.
자(字)는 화숙(和叔), 호는 사매당(四梅堂)이다. 명종조에 생원(生員)이 되어서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다가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조짐을 보고 귀향(歸鄕)하였다. 예학(禮學)을 연구하여 『가례부주(家禮附註: 가정의례에 대해 상세한 주석을 단 책)』를 저술(著述)하였고, 임진왜란(1592) 때는 71세의 고령(高齡)임에도 장성(長城) 남문창의(南門倡義)에 여러 아드님들을 이끌고 수창(首倡: 우두머리가 되어 제일 먼저 주창(主唱)함.)으로 가담하여 공(功)을 세웠다. 이어 영광(靈光)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추대되어 휘하 54현과 함께 왜적(倭敵)을 막았다. 향년(享年)은 84세이다.
배위는 의인(宜人)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참봉(參奉) 구연(九淵)의 따님이다. 참봉 공이 후사(後嗣)가 없어 사위인 사매당으로부터 외(外) 17대손인 규헌(奎憲) 대에 이른 오늘날까지 외손(外孫) 봉사(奉祀)가 이루어지고 있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당산(堂山) 산소동(山所洞)에 있으며, 묘장서원(畝長書院)과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 영광 수성사(守城祠)에 모셔졌다.

만취당 황종(黃鍾) (1534~1590)

쌍매헌 공 학(鶴)의 2남이다.
자(字)는 중초(仲初),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타고난 인품(人品)이이 순수(純粹)하고 효행이 남다르며, 총명이 유난히 뛰어났으므로, 스승인 외숙(外叔) 귤정(橘亭) 공 윤구(尹衢)에게 특별한 아낌과 기대를 받았다. 명종조에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양과(兩科)에 급제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서애 유성룡, 오리 이원익, 수우당 최영경 등 당대 명인(名人)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었다. 선조 때 조정에 천거되어 소촌도(召村道) 찰방(察訪)에 부임하였다가 송강(松江) 정철(鄭澈)과의 사감(私感)으로 기축옥사(己丑獄事: 선조 22년, 1589년)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옥사(獄死)하였다. 사림(士林)의 발의(發議)로 1603년 신원(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되고 복관(復官)되었다.
배위(配位)는 두 분으로 초취(初娶)는 공인(恭人) 금성 나씨이니,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선생의 따님이다. 재취(再娶)는 공인(恭人) 이천 서씨(利川徐氏)이니, 현감(縣監)을 지낸 주(註)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우리치(遇李峙) 쌍매헌공 묘소 아래에 있다. 묘장서원(畝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한천당 홍종(洪鍾) (1538~1612)

쌍매헌 공 학(鶴)의 3남이다.
자(字)는 계명(季鳴), 호는 한천당(寒泉堂)이다. 사매(四梅)ㆍ만취(晩翠) 두 형님과 더불어 외숙(外叔) 귤정(橘亭) 공 윤구(尹衢) 문하(門下)에서 배웠는데, 고금(古今)에 통달치 않은 바가 없었으며, 6년 여묘(廬墓: 상제가 무덤 근처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의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뭇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당대 지역 인사(人士)인 신응망(申應望)의 유고(遺稿)에 공을 칭송한 "6년의 여묘(廬墓) 기간 동안 한 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다.[六年居廬 一不下家(육년거려일불하가)]"라는 구절이 전한다.
당쟁(黨爭)의 화(禍)를 예견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던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매 모속 도유사(募粟都有司)로서 영광 법성포에 곡식을 모아 뱃길로 왕의 행재소, 고경명(高敬命)ㆍ곽재우(郭再祐)의 의병소에 보내고 장성남문 창의(倡義) 및 영광 수성(守城)에도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일찍이 효행(孝行)으로 참봉(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난후(亂後)에 순무사(巡撫使) 한준겸(韓浚謙)이 특히 공로(功勞)를 천거하였으나 여러 벼슬을 사양하였다. 왕명(王命)을 거역할 길 없어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에 부임하였으나 3개월만에 귀향(歸鄕)하여 학문(學問)과 덕(德)을 닦았다.
배위(配位)는 공인(恭人) 금성 나씨로,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선생의 손녀(孫女)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우리치(遇李峙) 쌍매헌 공 묘소 아래에 있다. 묘장서원(畝長書院)과 장성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 영광 수성사(守城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종파 극조(克操) (1546~1619)

사매당 공 응종(應鍾)의 장남이다.
자(字)는 자경(子敬)이며,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내었다. 임진왜란 때 사매당을 도와 창의대열에 참여, 군성(郡城)을 지켰다. 향년은 74세이다.
배위는 의인(宜人) 청안 이씨(淸安李氏)이니, 장성(長城)의 유명한 성리학자 석탄(石灘) 이기남(李箕南)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묘량(畝良) 당산(堂山) 산소동(山所洞) 사매당 묘소 아래에 있다.
공의 후손 중에서 효자(孝子), 학자(學者), 과거급제자 등 훌륭한 인물이 매우 많이 배출되었다.

주부 공 극지(克持)

사매당 공 응종(應鍾)의 2남이다.
자는 자수(子守), 호는 모헌(慕軒)이다. 임진왜란 때 사매당을 도와 창의대열에 참여하여 선조(宣祖)가 파천(播遷)한 의주(義州)와 광주의병소(光州義兵所)에 많은 의병(義兵)과 병기(兵器)ㆍ군량(軍糧)을 조달하였다. 선조(先祖)의 공훈(功勳)으로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어 출사(出仕)하였고, 후일 주부(主簿) 벼슬을 지냈으므로 후세에 주부 공으로 일컬어졌다.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고흥 유씨(高興柳氏)이며, 묘소는 영광군 대마면(大馬面) 화산(花山) 동록(東麓) 신의동(新衣洞) 마명당(馬明堂)에 있다.
후손 중에 저명한 인물로, 삼화주택회장을 지낸 유신(有信) 종현과 국사편찬 위원회(編纂委員會) 위원장을 지낸 현종(鉉淙) 종현이 있다. 두 분 모두 각별한 위선심(爲先心)으로 종사에 힘을 다하였으며, 특히 유신 종현은 완풍대군 파종회장과 양도공재경종친회장으로 봉무(奉務)하던 중 많은 사재(私財)를 쾌척하여 종사를 반석(盤石) 위에 올리는 데 기여하였다.

사부 공 극부(克扶) (1555~1623)

사매당 공 응종(應鍾)의 3남이다.
자(字)는 자정(子正), 호는 칠매(七梅), 혹은 우헌(愚軒)이다. 총명(聰明)이 탁월하고 사장(詞章)이 날로 진보하여 선조 무자년(戊子年: 1588)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임란(壬亂) 때 사매당을 도와 장성남문창의에 가담하였고, 영광으로 돌아와서 수은(睡隱) 강항(姜沆)과 함께 장서기(掌書記)ㆍ폐막관(弊官)의 직책으로 고을을 지켰다. 또, 숙부님 한천당(寒泉堂)을 따라서 의곡도유사(義穀都有司)가 되어 곡식을 모집하여 법성포를 통해 선조가 계시는 행재소(行在所)로 보내고, 의병과 양곡, 기계 등을 모집하여 광주(光州) 의병소와 곽재우(郭再祐) 진중(陣中)에 보냈다. 선조 30년(1597) 정유년에 천거에 의해 오수도찰방(鰲樹道察訪)에 제수되어 왜적을 막다가 왜적이 물러난 뒤 바로 귀향하였다. 뒤에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임란 때의 공로로 서거(逝去) 후 묘장서원(畝長書院) 및 장성의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와 영광 수성사(守城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배위는 숙인(淑人) 남원 양씨(南原梁氏)이니 별제(別提) 홍도(弘度)의 따님이다.
묘소는 영광(靈光) 구수면(九岫面: 백수면) 범현동(帆懸洞)에 있다.
공의 3남 성(: 1594~1653, 호는 梅軒)은 인조조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후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고 청의 연경(燕京)에 사신(書狀官)으로 파견되어 「연행일기(燕行日記)」를 남겼으며, 후일 벼슬이 청도군수(淸道郡守)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 정3품)에 이르렀다.

죽헌 공 극양(克揚) (1557~ ? )

사매당 공 응종(應鍾)의 4남이다.
자(字)는 자현(子顯)이며, 호는 죽헌(竹軒)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성품이 굳세고 과감하며 기절(氣節)이 있었다. 임란 때 사매당을 모시고 장성(長城) 남문창의(南門倡義)에 가담하여 활약하였으며, 영광에 돌아와 수성대장(守城大將)이 된 사매당 휘하에서 대장군관(大將軍官)이 되어 왜적을 막아낼 방비를 하였다. 또, 의병(義兵)을 조련하고 의곡(義穀)과 병기(兵器)를 모아 선조가 파천(播遷)해 계시는 의주행재소(義州行在所) 및 각처(各處) 의진(義陣)에 조달하였다. 이 같은 공로로 공은 후일 장성의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와 영광 수성사(守城祠)에 모셔졌다.
배위는 의인(宜人) 금성 나씨(錦城羅氏)이니, 대사헌(大司憲)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선생의 증손녀이다.
묘소는 영광군 불갑면(佛甲面) 우곡리(牛谷里) 산 32번지에 있다.

취옹 공 극정(克挺) (1560~ ? )

사매당 공 응종(應鍾)의 5남이다.
자(字)는 자호(子豪)이며, 호는 취옹(醉翁)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의위(忠義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총명이 뛰어나고 기우(氣宇: 기개와 도량)가 호매(豪邁: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남.)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친척이나 벗 가운데 생활이 어려운 이가 있으면 재물을 아끼지 않고 구휼(救恤)하였으며, 자질(子姪: 아들과 조카)이나 인근의 젊은이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간곡하게 타일러 깨우쳐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컫기를'우리 동방(東方)의 군자(君子)'라 하였다. 당시 극심한 당쟁(黨爭)과 간신(奸臣)들의 발호를 보면서 출세(出世)를 단념하고 경사(經史)에 전심(專心)하였으며, 임천(林泉: 산수ㆍ자연)에 뜻을 부쳐 거문고와 술로 시름을 달래었다.
배위는 의인(宜人) 진주 정씨(晋州鄭氏)로, 찰방(察訪) 함일(咸一) 공의 따님이다.
묘소는 장성군(長城郡) 외서면(外西面: 현 森西面) 가고치(枷鼓峙)에 있다.
공의 후손으로서 유명한 분으로는 고종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흥선대원군의 지우(知遇)를 받아 형조참판에 오른 충간공(忠簡公) 윤수(潤壽)가 있다.

이상에서 사용된 용어 중, 조선왕조 품계 및 외명부(外命婦) 관련 용어를 다음에 정리해 본다. 외명부란, 조선시대에 왕족 및 문무관(文武官)의 정실(正室) 부인(夫人)에게, 남편의 품계에 따라 내리던 봉작(封爵)을 말한다. 다음에 보인 문무관(文武官) 품계 일람 중 앞의 관계(官階)는 위[上], 뒤의 관계는 아래[下]에 속한다.

1. 문관(文官) 품계(品階) 일람
정일품(正一品) :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종일품(從一品) : 숭록대부(崇祿大夫), 숭정대부(崇政大夫)
정이품(正二品) : 정헌대부(正憲大夫), 자헌대부(資憲大夫)
종이품(從二品) : 가의(嘉義)ㆍ가정대부(嘉靖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
정삼품(正三品) : 통정대부(通政大夫)-이상 당상관(堂上官)
통훈대부(通訓大夫)-이하 당하관(堂下官)
종삼품(從三品) : 중직대부(中直大夫), 중훈대부(中訓大夫)
정사품(正四品) : 봉정대부(奉正大夫), 봉렬대부(奉列大夫)
종사품(從四品) : 조산대부(朝散大夫), 조봉대부(朝奉大夫)
정오품(正五品) : 통덕랑(通德郞), 통선랑(通善郞)
종오품(從五品) : 봉직랑(奉直郞), 봉훈랑(奉訓郞)
정육품(正六品) : 승의랑(承義郞), 승훈랑(承訓郞)
종육품(從六品) : 선교랑(宣敎郞), 선무랑(宣務郞)
-이상 참상관(參上官)
정칠품(正七品) : 무공랑(務功郞) -이하 참하관(參下官)
종칠품(從七品) : 계공랑(啓功郞)
정팔품(正八品) : 통사랑(通仕郞).
종팔품(從八品) : 승사랑(承仕郞).
정구품(正九品) : 종사랑(從仕郞).
종구품(從九品) : 장사랑(將仕郞).

2. 무관(武官) 품계(品階) 일람
정일품(正一品)으로부터 從二品(종이품)까지는 동반 관직과 같다.
정삼품(正三品) : 절충장군(折衝將軍)-당상관(堂上官)
어모장군(禦侮將軍)-당하관(堂下官)
종삼품(從三品) : 건공장군(建功將軍), 보공장군(保功將軍)
정사품(正四品) : 진위장군(振威將軍), 소위장군(昭威將軍)
종사품(從四品) : 정략장군(定略將軍), 선략장군(宣略將軍)
정오품(正五品) : 과의교위(果毅校尉), 충의교위(忠毅校尉)
종오품(從五品) : 현신교위(顯信校尉), 창신교위(彰信校尉)
정육품(正六品) : 돈용교위(敦勇校尉), 진용교위(進勇校尉)
종육품(從六品) : 여절교위(勵節校尉), 병절교위(秉節校尉)
-이상 참상관(參上官)
정칠품(正七品) : 적순부위(迪順副尉) -이하 참하관(參下官)
종칠품(從七品) : 분순부위(奮順副尉)
정팔품(正八品) : 승의부위(承義副尉)
종팔품(從八品) : 수의부위(修義副尉)
정구품(正九品) : 효력부위(效力副尉)
종구품(從九品) : 전력부위(展力副尉)

3. 부군(夫君)의 품계에 따른 부인(夫人) 봉작 명칭 일람
정1품(종1품 포함) - 정경부인(貞敬夫人)
정2품(종2품 포함) - 정부인(貞夫人)
정3품(당상관) - 숙부인(淑夫人)
정3품(당하관), 종3품 - 숙인(淑人)
정4품(종4품 포함) - 영인(令人)
정5품(종5품 포함) - 공인(恭人)
정6품(종6품 포함) - 의인(宜人)
정7품(종7품 포함) - 안인(安人)
정8품(종8품 포함) - 단인(端人)
정9품(종9품 포함) - 유인(孺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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