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종손
외삼문
성종조 영광 정착 후 양도공의 종손(宗孫)들은 지금까지 한 번의 이주(移住)도 없이 이 터를 지켜왔으며, 학문을 닦으면서 대대로 충(忠) ․ 효(孝) ․ 열(烈)의 삼강(三綱)에 입각한 꿋꿋한 선비정신을 구현(具現)해냈다. 종손들은 조선 중기 이후의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의 격화를 목도하며, 과거(科擧)에 합격하였더라도 대체로 현달(顯達: 벼슬과 명망이 높아서 세상에 드러남)의 길을 단념하고 그대로 향촌(鄕村)에 은거(隱居)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면 창의(倡義)하여 나라를 지켰고, 효행(孝行)과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다음에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양도공 종중의 종손들의 행록(行錄)을 간략히 정리해본다.
(1대) 여양군(驪陽君) 굉(宏) ( ? ~1417)
태종조 원윤(元尹: '君'과 같은, 王親의 봉작이다.)에 피봉되고 좌군총제(左軍摠制),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하다. 고종조에 이조판서에 추증되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는 정종(定宗) 왕비인 정안왕후(定安王后)의 아우이다.
여양군(驪陽君) 휘(諱) 굉(宏) 묘소
(2대) 월성군(月城君) 명인(明仁)
왕친으로서 세종조에 돈녕부 주부(主簿), 부사정(副司正) 등을 지낸 후 어머님 정부인(貞夫人) 김씨를 모시고 외조부(外祖父) 월성부원군의 별장(別莊)이 있는 전라도 담양(潭陽)으로 이주하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남원 양씨로, 대방군(帶方君) 명우(明遇)의 따님이다.
월성군 묘소
(3대) 효상(孝常)
담양으로부터 이주하여 영광 묘장(畝長: 지금의 묘량)에 정착하신 입향조(入鄕祖)이다. 종묘(宗廟) 배향공신의 적장증손(嫡長曾孫)이었으므로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어 사맹(司猛)을 지내다. 배위 의인(宜人) 광산 이씨는 병조참판 시지(時止)의 따님이자, 병조참판 윤종(胤宗)의 누이이다.
사맹공 효상 묘소
(4대) 세원(世元)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 부사과(忠佐衛 副司果)를 지내다. 양도공의 종통(宗統)과 종법(宗法)을 확립하고 현존(現存) 부조묘를 건립하다. 배위는 숙인(淑人) 함평 이씨로, 감찰(監察) 계인(繼仁)의 따님이며, 이조참판 긍(兢)의 현손(玄孫)이다.
사과공 묘소
(5대) 학(鶴) (1497~1577)
호는 쌍매헌(雙梅軒)으로, 진사(進士)가 되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도우(道友)로, 기묘사화 후 낙향하여 향리에 은둔하다. 배위 숙인(淑人) 해남윤씨는 호조참판 어초은(漁樵隱) 효정(孝貞)의 따님이다.
쌍매헌공 학 묘소
(6대) 응종(應鍾) (1522~1605)
호는 사매당(四梅堂)으로, 진사(進士)가 되다. 예학(禮學)에 통달하여 『가례부주(家禮附註)』를 저술하다.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영광성을 지켜내다. 배위 의인(宜人) 전주 최씨는 화릉참봉(和陵參奉) 구연(九淵)의 따님이다.
사매당공 묘소
(7대) 극조(克操) (1546~1619)
자는 자경(子敬)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의위 부사과(忠義衛 副司果)를 지내다. 임란 때 아버님 사매당을 모시고 창의(倡義)하다. 배위 숙인(淑人) 청안 이씨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제수된 성리학자 석탄(石灘) 이기남(李箕男)의 따님이다.
(8대) 탄(坦) (1572~1631)
자는 경행(景行), 호는 매오(梅梧)이다. 충의위 부사직(忠義衛 副司直)을 지내다. 문장이 뛰어났으나 과거에 마음 쓰지 않고 수양에 힘쓰다. 배위 의인(宜人) 나주 김씨는 진사(進士) 덕수(德秀)의 따님이며, 정주목사 공의 손녀이다.
(9대) 형복(亨復) (1597~1644)
자는 일지(一之)이다. 일찍이 종사랑(從仕郞)의 계(階)를 받다. 청년 시절, 자신의 불이익을 개의치 않고 과장(科場)에서 목격한 부정 사건을 폭로하여 곧은 성품이 조야(朝野)에 널리 알려지다. 배위 의인(宜人)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부장(部將) 걸()의 따님이며, 이조판서 신공제(申公濟)의 현손(玄孫)이다.
(10대) 수초(守初) (1627~1654)
자는 백오(伯吾)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다. 생부(生父)는 이조참판 복초재(復初齋) 형익(亨益: 1604~1687)이다. 배위는 증 숙인(淑人) 고령 신씨로, 통덕랑(通德郞) 기명(起溟)의 따님이다.
(11대) 상호(相虎) (1662~1718)
자는 문경(文卿), 호는 죽재(竹齋)이다. 숙종조에 효자(孝子)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내리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다. 배위 증 숙부인(淑夫人) 남원 윤씨는 시복(時復)의 따님이며, 문효공(文孝公) 윤효손(尹孝孫)의 8대손이다.
숙종조 이상호(李相虎) 효자 정려
(12대) 인훈(仁薰) (1692~1726)
자는 택지(宅之)이고, 호는 오재(梧齋)이다. 호조참판에 추증되다. 풍채와 거동이 아름답고, 문장이 뛰어나 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 승지 홍우서(洪禹瑞) 등이 매우 칭찬하고 장래를 촉망했으나 불행히 요서(夭逝: 나이 젊을때 죽음)하다. 2남 신봉(新峰) 복원(馥遠)이 행장을 짓다. 배위 증 정부인(貞夫人) 나주 오씨는 대광(大光)의 따님이자, 통훈대부 행 병조좌랑 이규(以奎)의 증손녀이다.
(13대) 필원(馝遠) (1713~1770)
자는 군술(君述)이고, 호는 정와(亭窩)이다. 영조조인 1773년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나라에서 복호(復戶: 조선 시대에, 충신·효자·군인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여 주던 일.)를 내리다. 아우인 신봉 복원과 평생 동거하며 깊은 우애를 나누다. 배위 진천 송씨는 헌(櫶)의 따님이며, 현실(玄室) 구(耉)의 현손(玄孫)이다.
(14대) 이석(以錫) (1734~1797)
자는 강중(剛中)이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정조 21년에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양과(兩科)에 합격하다. 어버이가 연로하시자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극진히 봉양(奉養)하다. 양도공의 영정(影幀)을 개모하고 이응도(二鷹圖)의 목판을 제작하다. 배위 공인(恭人) 연일 정씨는 중추부사(中樞府事) 표(杓)의 따님이며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8대손이다. 배위 공인(恭人) 여흥 민씨는 철수(喆洙)의 따님이며 좌랑(佐郞) 원중(元重)의 증손녀이다.
(15대) 윤신(潤身) (1774~1816)
자는 덕용(德容)이고, 호는 기암(箕巖)이다. 타고난 성품이 정수(精粹)하며 지조가 굳다. 배위 장택 고씨는 통덕랑 정익(廷益)의 따님이고,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8대손이다.
(16대) 민수(民秀) (1801~1851)
자는 천로(天老)이고, 호는 벽송(碧松)이다. 헌종 때(1847) 문장(門長)들과 더불어 양도공파 대동보인 『정미보(丁未譜)』를 편찬하다. 배위 제주 양씨는 구호(龜浩)의 따님이고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9대손이다. 배위 진주 강씨는 재호(在浩)의 따님이며,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이다.
(17대) 응백(應白) (1824~1857)
자는 채여(彩如), 호는 송당(松堂)이다.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나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불행히 요서(夭逝)하다. 배위 문화 유씨는 순석(舜錫)의 따님이고, 진사(進士) 식(植)의 손녀이다.
(18대) 경신(景信) (1856~1878)
호는 매당(梅堂)이다. 자품(資品)이 뛰어나 일찍부터 시례(詩禮)를 익히고, 인근의 촉망이 컸으나 불행히 요서(夭逝)하다. 배위 연안 김씨는 정수(鼎秀)의 따님이며 문익공(文翼公) 김여지(金汝知)의 후손이다.
(19대) 의갑(義甲) (1876~1908)
자는 경초(敬初)이고, 호는 매정(梅亭)이다.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기기를 잘하여 하늘이 낸 효자(孝子)의 일컬음을 받다. 일찍이「계자명(誡子銘)」을 지어 슬하 3형제(敬堂 龍淵, 剛齋 石淵, 貞齋 吉淵)을 훈육하다. 배위 울산 김씨(蔚山金氏)는 긍환(肯煥)의 따님으로,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다.
(20대) 용연(龍淵) (1897~1966)
자는 용일(用日)이고, 호는 경당(敬堂)이다. 문중을 중흥(中興)하다. 배위 김해 김씨는 참봉(參奉) 진욱(鎭旭)의 따님이다.
3ㆍ1운동(1919) 당시 영광 및 함평(咸平)의 문장(文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해방 후에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의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 가담해 활약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파손된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중건을 주도하고 그 사적비(事蹟碑)를 독담해서 건립한 바 있었다. 경당은 또한 두 차례의『양도공파 대동보』(신미보1931ㆍ갑오보1954)를 성공적으로 편찬한 것을 위시하여 역대 선조의 문집(文集) 발간, 묘비(墓碑) 건립, 각처 재각(齋閣)의 중건 사업 등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성공리에 완수함으로써 문중을 중흥시킨 공로자이기도 하다. 공은 만년에는 영광향교의 전교(典校)로 재임하며 미풍양속 선양에 온힘을 기울이다 향년 70세로 삶을 마쳤다.
경당공 용연(龍淵)
(21대) 동후(東候) (1920~ ? )
자는 내춘(來春)이고, 호는 신재(愼齋)이다. 배위 울산 김씨는 이중(利中)의 따님이고, 문정공(文正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다. 울산 김씨(恩洙: 1918~2002)가 구고(舅姑: 시부모님)를 잘 받들며,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에 힘을 다하여 부군(夫君) 부재(不在)의 종가를 훌륭하게 수호함으로써 효열(孝烈)로 널리 칭송되다.
(22대) 규헌(奎憲) (1947~ )
호는 묵정(墨靜)이다. 현재의 종손(宗孫)으로 중견 한국화가(韓國畵家)이다. 배위 신천 강씨는 학진(鶴鎭)의 따님이며, 판서(判書) 생경(生敬)의 후손이다.
(23대) 기정(基禎) (1974~ )
국사학(國史學)을 전공하다. 종손으로서의 자질(資質)을 갖추기 위해 꾸준히 연마(硏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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