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도공의 8대손으로, 의병장 응종의 손자이며, 왕자 사부 극부(克扶)의 3남이다. 자는 화봉(華封), 호는 매헌(梅軒)이다.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았고, 18세 때 향시(鄕試) 양장(兩場)에 합격하여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났다.
1635년(인조 13) 증광시(增廣試)에 갑과(甲科)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교예(敎隸)에 임명되고 1637년(인조 15)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가 되었다.
1639년(인조 17) 연서도찰방(延曙道察訪)·함경도 도사(都事), 1645년(인조 17) 병조·형조의 좌랑(佐郞)․정랑(正郞), 1647년(인조 25) 울진현령(蔚珍縣令)을 역임하였다. 1648년(인조 26)에는 동차하정사(冬差賀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 홍문관 교리(校理)·이조정랑을 지낸 뒤 1649년(인조 27) 청도군수(淸道郡守)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에 임명되었다. 특히 청도군수 재직시 청백한 생활과 선정(善政)으로 칭송이 높았다. 그 뒤 여러 번 출사(出仕)를 요청받았지만 모두 물리치고 독서와 시(詩)를 즐기며 지냈다.
저서에 『매헌유고(梅軒遺稿)』와 『연행일기(燕行日記)』가 있다.
묘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소재 응봉산에 있는데, 병조판서 원경하(元景夏)가 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양도공의 9대손이고, 사매당 응종의 증손자이며, 부사직(副司直) 탄(坦)의 2남이다.
자는 계중(季重)이요, 호는 복초재(復初齋)이다. 성품이 본디 강직하고,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였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학문 연마하기를 좋아하였다. 명망(名望)이 높아지자 호남의 선비들 중 문하(門下)에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 많았다.
숙종 10년(1684)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여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장열왕후(壯烈王后)가 회갑을 맞은 다음해에는 은일(隱逸) 명사(名士)로서 특별히 우대를 받아 조정으로부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었다.
세상을 뜨자, 50여 명의 문인(門人)들이 상복(喪服)을 입고 장례를 엄숙히 거행하였다고 한다. 묘소는 영광 군서면 남부 갑좌(甲坐)에 있다. 6대손 증 예조참판 윤우(潤雨)가 지은 「신도비문(神道碑文)」이 전한다.
자(字)는 문경(文卿), 호는 죽재(竹齋)이다. 양도공의 11대손이며, 사매당(四梅堂) 응종(應鍾)의 5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지극히 착한 성품을 지니어 부모님을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고, 점차 자라면서 부단히 효성(孝誠)을 더해갔으며, 받들어 모심에 극진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해서는 울음이 입에서 끊기지 않았고, 한 시도 상복(喪服)을 몸에서 떼지 않았으며, 죽[粥]으로써 상기(喪期)를 마쳤다. 하루에 두 번 묘소에 가서 곡(哭)하였는데, 추위나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몸이 몹시 상(傷)하여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아침ㆍ저녁 제사를 올렸는데, 모름지기 엎드릴 때에는 남의 부축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도 제사를 마친 후에야 그만두었다. 제사드리고 추모하는 일에는 더욱 삼가서 비록 한겨울이라도 반드시 목욕(沐浴) 재계(齋戒)하고 경건히 별실(別室)에 거처하였으며, 몸소 음식을 갖추되 오직 정성을 다하였다.
숙종조 경인년(1710)에 순무사(巡撫使) 권상유(權尙游)가 공의 이 같은 지극한 효행을 조정에 아뢰었던 바, 왕이 명하여 복호(復戶)를 내리고 쌀을 하사하였으며, 집에 정표(旌表: 즉, 효자 정문.)를 세웠다. 복호는, 조선왕조 때 충신, 효자, 열부가 난 집에 요역(
役)ㆍ전세(田稅) 이외의 잡부금을 면세해 주던 일을 말한다. 정표는, 사람의 선행(善行)을 칭송하고 이를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리는 표시판인 바, ‘효자이상호지문(孝子李相虎之門)’이라 새겨진 숙종조의 정표는 지금도 영광군 묘량면 영양리 당산 종가의 대문 위에 걸려 있다.
사후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이조판서 송덕상(宋德相)이 공의 「묘갈명」을 지었으며, 당대 저명 학자로 당시 영광군수였던 유최기(兪
基)가 「죽재이공정려기(竹齋李公旌閭記)」를 지어 공을 추모했다. 「정려기」는 10대손 동혁(東奕) 씨에 의해 국역(國譯)되어 종가 앞에 와석비(臥石碑)로 세워졌다.
자는 군열(君烈), 호는 신봉(新峰)이다. 양도공의 13대손으로, 아버지는 증 호조참판(戶曹參判) 인훈(仁薰)이고,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左承旨) 상호(相虎)이다.
어릴 때 아버님을 여의고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나주 오씨(羅州吳氏)의 엄한 훈도(訓導)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모친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님 필원(馝遠)과의 우애가 두터워 평생 분가(分家)하지 않고 한 집에서 기거하였다. 총명(聰明)함이 남달라서 소시(少時)부터 인근의 촉망하는 바가 컸으며, 절차탁마(切磋琢磨: 학문과 덕행의 닦음의 비유) 끝에 성리학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등극한 직후, 경학(經學)에 뛰어나고 행실이 방정(方正)한 선비를 천거하라는 왕명을 받들어, 조정이 공을 천거하였다. 왕이 곧바로 정릉 참봉(靖陵參奉)을 제수(除授)하니(1777), 공이 누차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부임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칭탁하며 그만두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을 대우하여 정조 14년(1790)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계급을 올렸고, 정조 18년(1794)에는 또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렸다.[이상 정조조의 『일성록(日省錄)』『어정인서록(御定人瑞錄)』 참조.]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수양과 학문에 전념했던 공은, 당산(堂山) 향리 뒷산에 신봉정사(新峰精舍)를 지어 독서ㆍ연구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문하생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아드님 윤성(潤聖), 진사ㆍ생원 양과에 급제한 장조카 이석(以錫), 족제(族弟:친척아우) 경석(敬錫), 강주영(姜柱榮), 효행과 학문이 뛰어났던 족제(族弟:친척아우) 건원(建遠) 등이 있다.
서거 후, 공은 순조조에 전라도 지역을 순회하던 어사 유성환(兪星煥)의 장계(狀啓)에 의해 이재(
齋) 황윤석(黃胤錫)ㆍ존재(存齋) 위백규(魏伯圭)와 더불어 포상(褒賞)이 청해지기도 하였다.[위백규의 『존재집(存齋集)』 참조.] 또, 문인(門人)과 호남의 사림(士林)들은 공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영당사(影堂祠: 지금의 묘장서원)에 모시어, 춘추(春秋)로 제사 드리며 맑고 높은 덕을 기렸다. (『묘장서원지』 참조.)
자는 영숙(永叔), 호는 소헌(疏軒). 양도공의 13대손으로, 청단도 찰방(靑丹道 察訪) 세형(世亨)의 9대손이고, 설(楔)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경전(經典)에 능통하고 시(詩)를 잘 지어 수재(秀才)로 이름났으며, 부모의 상을 당해 6년을 매일 성묘하여 효자의 일컬음을 들었다.
1774년(영조 50)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786년(정조 10)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1802년(순조 2)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조정랑(吏曹正郞), 1814년(순조 14)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우주정화(宇宙精華)』, 『구주산천집설(九州山川集說)』, 『동국산수기(東國山水記)』 『수기록(搜奇錄)』, 『황명명신집록(皇明名臣輯錄)』, 『동야문견설(東野聞見說)』 등이 있었으나 전쟁을 겪으며 없어져,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거(逝去) 후 전남 영광군 군남면 소재 육왕사(六旺祠)에 모셔졌으며, 유물(遺物)로 영정(影幀)이 있다. 공의 행장(行狀)을 성리학자로 헌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송치규(宋穉圭, 1759~1838)가 찬술하였다.
양도공의 13대손이고, 한천당의 7대손이며, 시걸(時杰)의 아들이다. 자(字)는 여관(汝寬), 호(號)는 복성헌(復性軒)이다.
성품과 도량(度量)이 너그러웠으며,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칭찬을 받았다. 어버이의 병환이 위독(危篤)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 약(藥)에 섞었으며, 정성을 다해 하늘에 기도(祈禱)하였다.
어린 나이부터 족형(族兄)인 신봉 공(新峰公)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여 문예(文藝)가 일찍 이루어졌다.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쏟아 일가(一家)를 이루었는데, 호를 복성헌(復性軒)이라 한 것만 보아도 자신의 순수(純粹) 지선(至善)한 성(性)을 회복하고자 하는 신념과 의지가 어떠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영조(英祖) 50년 갑오년(1774)에 실시된 증광시(增廣試)에 진사(進士) 3등(三等)으로 합격하였으며, 성균관에서 수학하며 이름이 높이 드러났다. 재주와 행실, 학문으로 두 번이나 조정(朝廷)의 관직 추천(推薦) 명단에 든 바 있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으며, 오직 학문과 수양을 목표로 정진하였다.
자는 맹희(孟希), 호는 칠우(七迂)이다. 양도공의 15대손이며, 신봉 복원(馥遠)의 장손(長孫)이고, 진사(進士) 이집(以鏶)의 아들이다.
영특한 자질과 인품으로 기정진(奇正鎭: 장성 출신으로 성리학 6대가로 불림.) 등 당대 유현(儒賢)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중년(中年)에 장성 동쪽에 정사(精舍)를 짓고 강학(講學)에 전념하였다. 공의 학행(學行)이 인정되어 1822년(순조 22)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는 `박학역행인 숙유(博學力行人 宿儒)'라 칭하며 조정에 천거한 바 있다.
1827년(순조 27) 뒤늦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부(主簿)·감찰(監察)·지평(持平)을 역임하고, 1829년(순조 29) 정3품으로서 태천군수(泰川郡守)로 부임하여 오교(五敎: 다섯가지 가르침. 즉, 충ㆍ효ㆍ의ㆍ용ㆍ인)를 선양하고 흥학(興學)한 공적이 뛰어나 관찰사 김학순(金學淳)에 의하여 조정에 포상을 청하는 보고가 올려졌다. 또한 청백(淸白)과 애민(愛民)으로 백성을 다스려 1831년 공이 별세하자 이민(吏民: 고을 아전들과 백성)이 공을 애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평소 이기설(理氣說)과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였고 홍석주(洪奭周)·김조순(金祖淳)·조인영(趙寅永) 등과 교분이 깊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한 것이 문집(文集) 및 100여 통의 간찰(簡札: 편지)에 나타나 있다.
문집(文集)으로 『칠우집(七迂集)』이 있고, 유물(遺物)로는 명사(名士)와 교유한 간찰(簡札) 등이 있다.
자는 치오(致五), 호는 오소(吾巢). 양도공의 15대손이고, 취옹 공의 8대손이며, 증 참판(參判) 이박(以搏)의 아들이다.
향리(鄕里)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중 뒤늦게 1865년(고종 2)에 64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재직 중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치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섭정(攝政)하던 흥선대원군이 특히 공을 지우(知遇)하였으며, `호남 제일재상'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1868년(고종 5)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 종정경과 경연특진관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동면 상우리 산 8번지에 있다. 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성리학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찬술하였다.
철종(哲宗) 5년 갑인년(1854) 담양 홍암 선산의 명산재(明山齋)를 중건할 때 공이 쓴 「상량문(上樑文)」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자는 일여(一如), 호는 매헌(梅軒)이다. 양도공의 17대손이며, 정조조의 경학현량지사(經學賢良之士) 신봉(新峰) 복원(馥遠)의 현손(玄孫)이다. 소시부터 전국 8장사로 일컬어질 만큼 용력(勇力)이 뛰어나 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다. 재예(才藝)와 문필(文筆)도 함께 뛰어나 고종(高宗) 초엽(임신년, 고종 9년)에 조정에 천거된 바 있으며, 당시 집정(執政)하던 흥선대원군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나 출사(出仕)하지 않고 하향(下鄕)하여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였다. 1902년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담양 홍암 능동 정부인(貞夫人) 산소의 석물(石物) 공사, 명산재(明山齋) 중건(重建), 고양군 양도공 신도비(神道碑) 건립 등의 큰 종사를 주도하였으며, 서예(書藝)에도 뛰어나 양도공 신도비의 두전(頭篆)을 썼다. 경술국치(1910. 8. 29)를 당하자 비분(悲憤)을 참지 못해 상심(傷心)하다가 이로부터 와병(臥病)하였으며, 곡기(穀氣)를 삼키지 못하고 인삼즙 등으로 연명(延命)하다가 3개월여 만에 졸(卒)하였다. 담양군 용암리 홍암 능동 선영 내에 묘소가 있다.
자는 사유(司維), 호는 지은당(芝隱堂)이며, 이름을 사유(士有)·안사유(安士有)·지백(之白)으로도 불렀다. 양도공의 17대손이며, 병절교위 공의 14대손이다. 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문발(文發)이다. 전남 장성군 삼계면 좌초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좌초리 서재에서 한문(漢文)과 병서(兵書)를 수학하고 그 서재의 중심인물이 되어 훈육에 힘쓰던 중 1881년에는 기우만(奇宇萬) 등과 함께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 참여하였다.
1898년에는 당질(堂姪)인 화삼(化三)을 도와 탐학(貪虐)이 극심한 흥덕군수 박용현(朴鏞炫)을 축출하고 옥고(獄苦)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니, 공은 봉기하여 화삼 및 학당 출신 제자들과 함께 250여 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자신이 맹주(盟主)가 되고 화삼을 총대장으로 하여 장성·발산·고성산·만화동·반월 등의 전투에서 왜적을 무찌르다가 마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근고팔도사민서(謹告八道士民書)」를 보내왔으므로 능주 쌍봉사에서 합류하였다.
이번에는 최익현을 맹주(盟主)로 하여 이백래(李白來)·양회일(梁會一)·백홍인(白弘寅)·심남일(沈南一)·임창모(林昌模)·전해산(全海山) 등 50여 의병장과 함께 능주·화순·동복을 완전히 탈환하였으나, 1907년 4월 24일 광주를 탈환코자 진군하던 중 광주와 동복 사이에서 왜군 복병대(伏兵隊)에 의하여 피습, 패전하였다. 이 때 의병장(義兵將) 1명은 순국하고, 6명은 붙잡혀 유배되었으며 20여 명은 부상이 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왜적과의 정면 대전(對戰)이 불가하게 되자 공은 유격전을 기도(企圖)하여, 장성·영광·흥덕·담양 지역의 의군(義軍) 책임자로서 새로이 격문(檄文)을 포고하고 의병진을 재정비하였다. 이어, 1907년 2월 삼북지서 습격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100여 회나 계속하였으며, 결국 고산 전투에서 많은 의사들과 함께 순국(殉國)하였다.
양도공의 18대손이고, 병절교위 공의 15대손이며, 증 통정대부 지백(智白)의 장남이다. 초명은 영신(永信)·영환(永煥)으로, 전남 장성군 삼계면 좌초리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12월 27일 영학당(靈學黨) 당수(黨首)로서, 탐학이 극심한 흥덕군수 박용현(朴鏞炫)을 농민 300여 명과 당숙(堂叔)인 사유(司維, 일명 基白)의 지원 아래 축출하고 동월 30일 광주 관찰부 순검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니 각처에서 봉기, 창의(倡義)할 때 총대장이 되어 동년 10월 장성에서 일군(日軍)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에 비하여 병기와 훈련이 부족하였으므로 100여 명의 부대를 인솔하고 석태산으로 들어가 병기(兵器)를 주조하고 병사를 훈련하며 전력(戰力)을 재정비하였다. 때마침 면암 최익현의 「근고팔도사민서(謹告八道士民書)」를 받고 즉시 능주 쌍봉사로 가서 호남 의병진에 참여하여 최익현을 맹주로 하고 제6로군에 소속되어 6로군의 관하 장성·영광·흥덕·담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4월 18일 무장 고산 전(戰)을 위시하여, 5월 8일 불갑산 전, 9월 12일 고창 석곡 전, 10월 20일 영광 백수 전, 10월 27일 불갑산 전(戰), 11월 4일 무장 장사산 전 등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승전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이대극(李大克 )부대와도 합류하여 연합 전투를 하였으며, 1909년 4월 3일 이대극 대장이 순국하고, 족숙(族叔)인 사유대장도 순국하자 공은 이 부대를 이끄는 의병장이 되었다. 이 때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헌병부대가 9∼10월에 걸쳐 전남지역 토벌작전을 벌여 남도출신 103명의 의병이 순절(殉節)하였다. 이에 공은 고군분투하다가 1910년 1월 28일 고성산 전투에서 순국(殉國)하였다.
1986년 국가에서는 공에게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1987년에는 영광 향교가 주관하고 영광 각 사회단체가 후원하여 영광읍내 공원에 공의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공의 묘소는 전남 장성군 삼계면 자초리 고성산 아래 대동(大洞) 자좌(子坐)에 있다.
양도공의 19대손이고, 사매당의 13대손이다. 할아버지 경섭(京燮)은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이고, 아버지 명로(明老)는 통정대부 내부(內部)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후 1906년 가선대부가 되었다. 어머니 울산 김씨는 하서 김인후의 후손이다.
공의 자(字)는 정삼(鼎三)이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富安面) 하오산(下鰲山)에서 태어났으며, 유년시절부터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선조(先祖)를 위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광무 2년(1898) 종친부 참봉(參奉)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이듬해 6품으로 승진하였으며, 광무 6년(1902)에는 외부 참서관에 올랐고, 정3품 통정대부로서 전라북도 금구군수(金溝郡守)를 역임하였다.
1903년 흉년으로 인해 굶주리는 주민(住民)들이 많아지자 공이 과감히 창고를 열어 생계(生計)가 어려운 많은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였다. 이에 군민(郡民)들이 그 은덕(恩德)을 기리는 포덕비(布德碑)를 금구향교(金溝鄕校) 앞에 세웠다.
양도공의 18대손이고, 통정대부 심백(心白)의 2남이다. 자(字)는 정집(正執)이다. 전남 장성군 장성읍 안평리에서 태어났다. 소시부터 아버님 매헌(梅軒) 공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서 인근에 널리 알려졌다. 고종 29년(1892)에 무과(武科)에 급제하니(병과 17위 합격), 그 때 나이 19세였다. 관직이 선무랑(宣務郞) 행(行)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으나, 얼마 안 있어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비분(悲憤)을 억누르며 향리(鄕里)에 은거했다. 무과(武科) 합격증인 홍패(紅牌)를 장손(長孫) 우연(友淵)이 소장하고 있다. 묘소는 공이 만년에 기거하였던 영광 묘량 당산 산소동의 뒷산 기슭에 있다.
양도공의 14대손이며, 월평군의 16대손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동식(東植)이다. 호는 효산(曉山)이다. 평생을 전주에서 살며 활동했던 서화가(書畵家)이다.
어려서부터 서예(書藝)에 정진하여 일제시대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차 입상(入賞)하였으며, 노경(老境)에는 호남(湖南)의 명필(名筆)로 일컬어졌다. 여러 서체에 두루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군자(四君子)에도 탁월한 경지를 보였다.
양도공의 19대손이며, 병절교위 공의 16대손이다. 아버지는 진신(璡信) 이며, 전남 무안군 청계면 복길리 출생이다. 족보(族譜) 명은 의주(義宙)이며, 호는 춘곡(春谷)이다.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에 눈 떠,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하고 목사(牧師)가 되어 목회(牧會) 활동을 하였으며, 일제하에서 신사(神社) 참배(參拜) 거부로 2년여의 옥고(獄苦)를 치렀다. 해방 후에도 1947년에 한국 기독교회의 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설립된 목포고등성경학교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목포지부장으로 추대되어 혼란기에 처한 민족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였다.
1948년 5․30 총선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소속으로 제헌의원(制憲議員)에 당선되었으나(1948년 5월 31일~1948년 10월 19일까지 재임.), 몇 개월 후 이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간곡한 청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고 초대(初代) 전라남도지사(全羅南道知事)에 취임하여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승만 정부의 독주(獨走) 행태를 보면서 자유당 세력과 결별하였다. 이후 다시 제5대 국회의원(國會議員: 參議員)에 당선되어 활약하였다.(민주당, 1960년 7월 29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재임.)
그는 해방 직후에는 민족주의자적 입장에서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 운동에 앞장섰고, 제헌의회 시절에는 반민법(反民法) 제정을 통해서 친일(親日) 부역자(附逆者)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양심 있는 정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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