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도공 묘소와 재실 고양재
양도공묘소와 고양재 전경
양도공의 서거(逝去)와 묘소의 조성

양도공은 태종 17년(1417) 4월 25일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셨다. 탄생(誕生) 연대가 역대의 보첩(譜牒)이나 정조(正祖) 때 13대손 신봉(新峰) 복원(馥遠) 공이 지은「양도공유사(襄度公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 갑오년(1354)인 바, 양도공은 예순 네 살에 돌아가신 셈이다.
공이 서거(逝去)하시니, 태종께서는 심히 놀라고 애통해하였고, 여러 날 동안 고기반찬[肉饍]을 금하며 추도(追悼)의 정을 다하였다. 부음(訃音)이 도달하자 사흘 동안 조회(朝會)를 철폐하였으며, 제사를 내려 위로하였는데, 부의(賻儀)로 쌀과 콩 아울러 70석과 종이 150권을 하사(下賜)하였다. 시호(諡號)를 양도(襄度)라 하니, 시법(諡法)은 전쟁에 공이 있음을 ‘양(襄)’이라 하고, 마음이 능히 의(義)를 제어함을 ‘도(度)’라 한다.
그 해 6월 4일 태종은"완산 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의 장례가 8월 23일에 있으니, 회격(灰隔)을 써서 매장하고, 그 광(壙) 밖에 소용되는 큰 돌은 추수(秋收)를 기다려서 실어들이라."분부하였다. 묘소 석축(石築) 등에 쓰이는 돌 등이 길가의 곡식을 밟아 손상(損傷)시킬까 염려하여서였다는 사관(史官)의 부연이 있지만, 이상의 기사(記事)들을 볼 때, 임금은 공을 특별히 예우(禮遇)하여 성대한 예장(禮葬: 국장)을 치르게 하였을 뿐더러, 장의(葬儀) 방법이나 석물(石物) 운반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동년(同年) 8월 23일, 공의 유해(遺骸)는 고양군 학령산(高陽郡 鶴翎山)-지금의 고양시 성석동(城石洞) 상감천(上甘川: 俗名 웃감내) 산 203번지-에 모셔졌다. 양도공의 묘소는 예로부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여말(麗末) 충신(忠臣) 최영(崔瑩) 장군의 묘소와 함께 고양(高陽) 8명당(八明堂)의 하나라고 전해진다.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으로 볼 때, 자손들이 번성하고 무궁한 복록(福祿)을 누릴 수 있는 혈(穴)이라는 것이다. 과연, 후손들의 수효가 현재 10만이 넘고 역대 후손 중에 충ㆍ효ㆍ열로 빛나는 숱한 인재가 배출된 것을 보면 이 말이 결코 허언(虛言)은 아닌 듯하다.

종손과 영광 묘장(畝長) 문중(門中)의 묘소ㆍ재실 관리
완산부원군 이천우(李天祐) 행적 현판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 종가가 있는 본동(本洞)인 영광(靈光) 일대와 고양(高陽) 선산(先山)의 거리가 멀어서 후손들이 자주 내왕(來往)할 수는 없었지만 종손과 도유사(都有司), 그 밖의 문중 대표들은 시제(時祭)를 모시기 위해서 혹은 선산(先山)과 산소(山所)를 돌보기 위해 가끔씩 상경(上京)하였고, 500여 년 간 산소(山所)의 모든 일은 종가가 있는 묘장(畝長) 문중(門中)에서 처결(處決)하였다. 4대 종손 세원(世元) 공이 종통(宗統)을 완전히 확립했을 당시는 물론 그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양도공 묘소에는 아직 태종조 예장(禮葬) 때 국가(國家)에서 함께 하사(下賜)한 많은 전답(田畓)과 재실(齋室)이 남아 있어 관리에 별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여러 문헌을 살펴볼 때, 양도공의 역대 종손(宗孫)들이 주도적(主導的)으로 선산(先山) 관리와 봉제사(奉祭祀)를 봉행(奉行)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양도공유사(襄度公遺事)」에는 정조조의 인물인 양도공 14대 종손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이석(以錫) 공이 양도공 묘소의 개초(改莎)를 주관(主管)하면서 양도공의 행적(行蹟)이 담겨 있을 지석(誌石)을 찾아 묘소의 봉분(封墳)을 열어 숯과 석회[炭灰]에까지 파보았다는 기록이 실려 있으며, 20대 종손 경당(敬堂) 용연(龍淵) 공이 저술한『고양재중건일기(高陽齋重建日記)』에는 고종조(1899년)의 고양재 중건시에도 19대 종손(宗孫)인 의갑(義甲)공을 대행하여(代行)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심백(心白) 공이 상량문(上樑文)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 1902년에 이루어진 신도비 건립 사업 또한 의갑 공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 일제하인 1932년 양도공 묘소가 도굴(盜掘)되었을 때 산지기의 전보(電報)를 받고 급히 상경하여 일을 수습한 것이나, 1940년의 고양 선산(先山) 일대(一帶) 문중(門中) 토지의 신탁(信託) 계약(契約) 체결, 1960년의 고양재 중건이라는 대역사(大役事) 추진 역시 종손 용연(龍淵) 공과 묘장 문중의 대표들이었다.

재실(齋室) 고양재(高陽齋)의 거듭된 중건(重建)
고양재 중건일기(경당 저술)

조정(朝廷)에서는 건국(建國) 원훈(元勳)에 대한 예우로 여러 달에 걸쳐 묘역(墓域)을 조성한 데 이어, 사패지(賜牌地)인 묘역(墓域)에 수십 칸짜리 재실(齋室)을 건립(建立)하여 묘소를 수호(守護)하고 향사(享祀)하게 하였다.
양도공 묘소의 재실(齋室) 고양재(高陽齋)는 현재 묘소 아래 우측(右側)에 위치하고 있다.『고양재중건일기(高陽齋重建日記)』(敬堂 李龍淵 著, 1960)에 의하면, 묘소 아래에 당초 32칸의 재실과 90여 두락의 전답(田畓)이 있었다는데, 재실은 일기 쓰는 그 시점(時點)에서 125년 전인 을미년(1835)에 소실(燒失)되었고, 전답(田畓)은 선영 아래 거주하는 여성군(驪城君) 후손들의 관리(管理) 부실(不實)로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고양재(高陽齋)의 현 건물은 1899년에 중건(重建)한 것을 1961년에 또다시 중건(重建)한 것이다. 재실이 너무 퇴락한 것을 안타까이 여긴 종손(20대 종손 敬堂 諱 龍淵)과 문중 원로들이 1959년 9월에 처음 발의하여, 전북 고창(高敞) 어느 명가(名家)의 사랑채를 매입해 옮겨 세운 것이 현재의 재실이다. 「고양재 상량문」에 의하면 발의 후 완공까지 약 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던 듯하다. 전후(戰後)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후손들의 성금(誠金)으로 당시로서는 큰 역사(役事)가 이룩된 것이다.

고양재

고종조(高宗朝)인 광무 6년(1902) 19대 종손 의갑(義甲) 공은 양도공 묘소에 묘도문자(墓道文字)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문중의 의사를 규합한 끝에 신도비(神道碑)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신도비문(神道碑文)은 의갑 공이 청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던 대성리학자 송병선(宋秉璿: 文忠公, 을사조약 때 殉國)이 찬술하였다. 신도비는 이 해에 묘에 들어가는 입구에 세웠다. 이 신도비는 1978년 20대손 대연(大淵) 종현이 개수(改竪: 다시 세우다)하였는데, 두전(頭篆)은 옛것을 그대로 옮겨 새기고 종후손(從後孫) 학용(學庸)씨가 새로 글씨를 써서 새겼다. 묘비(墓碑)는 1979년 18대손인 유신(有信)ㆍ19대손인 해진(海鎭) 종현이 새로 세웠다.

고양재완산부원군 양도공 이천우(李天祐) 신도비
산변(山變)-묘소 도굴(盜掘) 사건-의 발생

1932년 3월 25일 밤에 양도공 산소에 흉변(凶變)이 발생했다. 도굴범들이 부장품(副葬品)을 노려 묘소를 파헤친 것이다. 익일(翌日)인 26일 오후 5시경에 특별 전보를 접수한 종손(龍淵 공)은 즉시 문회(門會)를 개최하였던 바, 많은 일가(一家)들이 모여들어 노소(老少) 할 것 없이 서로 마주보며 통곡(痛哭)하였다.
문회(門會)의 결정대로 종손과 문봉(文鳳)씨는 다음날 27일 새벽에 출발하여 당일 감천리(柑川里) 산소(山所)에 도착하였는데, 묘소를 살핀즉 파헤쳐진 관곽 위로 유해(遺骸)가 드러나 있어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두 분은 망극하고 비통(悲痛)한 마음에 통곡을 그치지 못하면서도 안장(安葬)의 절차를 진행하였다.
두 분은 다시 서울로 나와 관(棺)과 제복(祭服), 천막(天幕), 제물(祭物) 등을 준비한 후 문복(文復), 현승(鉉升) 두 분을 동반(同伴)하여 묘소로 돌아왔다. 이윽고 4월 1일부터 묘소를 수리하고 안장해 모시기 위한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는데, 이 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산소 아래 부락민들이 백여 명이나 달려와, "부원군 산소가 이런 참사(慘事)를 당하였는데 좌시(坐視)하는 것은 우리의 도리(道理)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연 4일 동안이나 나와 일을 도와준 것이다. 그래서 비록 막대한 비용은 났으나, 역사(役事)만은 여의(如意)하게 완료하였다고 한다. 안장 후 제사 올리면서 아뢴 축문(祝文)이 지금까지 종가에 전한다. 당년 4월 9일자의 고유문(告由文)이다.

양도공 산소 도굴 수습후 고유(告由)한 축문
선산(先山)의 등기(登記)와 신탁계약, 종중의 소유권 확립

선산(先山)과 일대 부속 토지(土地)는 별다른 등기 문서 없이 조선왕조 500년을 내려오다가 일제(日帝)의'조선부동산등기령'(1912)에 의해 묘소 아래에 사는 후손 종오(鍾五), 종순(鍾舜) 명의로 1917년에야 등기(登記)되었다. 이분들은 양도공의 차남인 여성군(휘 完)의 후손들로 선영 아래 500여년 세거(世居)하며 산소 수호[山直]역할을 해오던 이들이기에 우선 임시 조치로 명의(名義)를 빌린 것이다.
하지만, 선산을 후손 개인 명의로 오랜 기간 둔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한 일이었기에 1940년에 이르러 20대 종손 용연(龍淵) 공이 주도하여, '미구(未久)에 그 명의를 원래의 소유주인 문중(門中)으로 환원(還元)하기로 한다'는 내용의 신탁(信託) 계약(契約)을 성립시켰다. 선산(先山) 20정 7반 7묘와, 전답 2,541평에 대한 신탁계약이었다.

고양 선산 및 부속 위토에 대한 신탁계약서

양도공 종중은 이 계약에 따라 1966년 선산(先山)과 위토(位土)의 명의를 후손(後孫) 대표 15인 연명(連名)으로 등기 이전하였다. 이제 양도공 종중 소유로 소유권이 사실상 환원된 것이다. 선산은 20정 7반 7묘, 밭이 144평, 논이 2,288평으로 등록되었는데, 이는 일가들이 헌성한 위토를 포함한 총량이었던 바, 그런데도 1940년 신탁계약 당시보다도 상당량의 전답이 축소된 규모였다. 이는, 산소(山所) 수호인(守護人)이 선산(先山)과 위토(位土)의 명의(名義) 환원에 전폭 협조하게 하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 개재(介在)된 불가피한 결과였다.
선산과 부속 토지[田畓]는 이후 1972년부터 몇 년 간 22대 종손 규헌(奎憲)과 도유사(都有司) 현오(鉉午) 씨 양인(兩人) 명의로 등록되는 과정을 거쳐, 1980년에 특별조치법이 발효됨을 기회로 삼아 연명(聯命) 등기(登記)는 해제되고, 드디어 양도공 종중(襄度公宗中) 명의로 정식(正式) 등기되었다. 등록번호는 112180-3138811이다.

고양시 향토유적(鄕土遺蹟)으로의 지정(指定)
향토유적지 지정 현판
양도공 묘소는 모셔진 인물인 양도공의 역사적 비중, 민족사적 기여도, 묘소 자체의 역사성 등이 인정되어 1986년 6월 16일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향토 유적(鄕土遺蹟) 제7호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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