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당사와 묘장서원
영당사(影堂祠)
조선조 광해군 8년(1616), 조정의 사학(私學) 장려정책에 힘입어 영광(靈光)에서는 맨 처음으로 사림(士林)과 후손(後孫)에 의해 묘장 영당(畝長影堂)이 창건(創建)되었다.
주향(主享) 인물(人物)인 양도공(襄度公) 이천우(李天祐, 1354-1417)는 여말(麗末) 동녕부(東寧府)의 수령(首領)으로 있다가 숙부(叔父)인 태조의 휘하에 들어가 우왕(禑王) 6년(1380) 남원(南原) 운봉(雲峰)에서 벌어진 황산대첩(荒山大捷) 등 누차(屢次)의 왜구섬멸전에서 많은 공(功)을 세웠다. 조선 건국 초기에 개국 원종(開國原從)ㆍ정사(定社)ㆍ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병조(兵曹)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으며, 서거(逝去) 후 태종 묘정(太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양도공 이천우는『태종실록』소재 그의 「졸기(卒記)」에도 나오듯이 여말(麗末) 왜구토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를 모신 부조묘(不廟)와, 영정(影幀), 회맹축(會盟軸)ㆍ이응도(二鷹圖) 목판(木版) 등이 미술사적 가치까지 인정받아 오래 전 이미 지방문화재(전남도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指定)된 바 있다.
묘장영당(畝長影堂)은 그의 위패(位牌)와 태종이 하사한 영정(影幀), 이응도(二鷹圖)를 봉안하고, 춘추(春秋)의 중정(中丁)에 유림(儒林)이 향사(享祀)하며, 강학(講學) 기능을 수행해왔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의 제도(制度)와 문물(文物)을 총체적으로 집대성(集大成)해 수록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조선조 후기 영조(英祖)의 명(命)으로 서명응(徐命膺)ㆍ채제공(蔡濟恭) 등에 의해 영조 45년(1769)부터 편찬되기 시작하여 조선 말엽까지 계속 보완(補完)됨.]의「학교편(學校編)」과 『전고대방(典故大方)』[구한말(舊韓末) 강효석(姜斅錫)이 편찬하여 일제(日帝) 초에 간행함.]의「서원향사록(書院鄕祠錄)」에도 나와 있다. 고종조에 신태관(申泰寬) 영광군수에 의해 최초로 간행된 『영광읍지(靈光邑誌)』에 의하면, 묘장영당(畝長影堂), 백산서원(柏山書院), 용계사(龍溪祠), 용암사(龍巖祠), 수강사(壽崗祠), 장천사(長川祠)는 당시 원생(院生) 15인으로 강학(講學)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묘장서원
건국(建國)의 원훈(元勳)인 양도공의 향사(享祀), 그리고 교육적 기능의 충실한 수행은 널리 다른 사우(祠宇)들의 모범이 되었고, 그래서 조선 후기 전 기간을 통해서 조정(朝廷)의 관심과 배려(配慮)도 이어졌다. 고을 원[邑宰: 군수]들의 방문(訪問)과 봉심(奉審)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춘추(春秋) 향사(享祀) 때와 중요한 명절(名節)에는 관청을 통해 제수(祭需)를 보내왔으며, 영당사(影堂祠) 보호책으로 인근(隣近) 10여 호(戶)의 부역(賦役)을 면제(免除)하게 하였다. 현재 묘장서원(畝長書院)에 보관되고 있는 무오년(戊午年: 정조 22년, 1798)ㆍ갑자년(甲子年: 순조 4년, 1804)ㆍ정묘년(丁卯年: 순조 7년, 1807)ㆍ임신년(壬申年: 순조 12년, 1812)의 완문(完文: 증명ㆍ허가ㆍ인가ㆍ명령 등의 처분사안에 대해 당해 관청이 발급한 승인문서.)들은 영당사(影堂祠)의 관리, 보호, 육성을 위한 관계 행정 당국(當局)의 특별한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갑자년 완문(完文)의 경우, 잡역(雜役: 여러 가지 부역.) 면제(免除)의 철폐(撤廢)라는 조정(朝廷)의 방침(方針)에도 불구하고 묘장영당(畝長影堂)만은 예외(例外)를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조22년 완문(完文)
순조4년 완문(完文)
묘장영당(畝長影堂)은 영조 23년(1747) 유최기(兪最基) 영광군수가 사우기(祠宇記)를 지어 양도공에 대해 각별한 경모(敬慕)의 뜻을 표했고, 순조 기축년(1829)에는 암행어사 유성환(兪星煥)이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현판)을 내리던 일.)을 청하는 장계(狀啓: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관하(管下)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던 일. )를 올렸으며, 이어 경명행수(經明行修: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름.)로써 정조(正祖) 때 조정(朝廷)에 징초(徵招: 부르심을 받음.)된 은일(隱逸) 성리학자(性理學者) 신봉(新峰) 이복원(李馥遠) 선생을 추배(追配)한 후 그 어른의 문인(門人) 진사(進士) 강주영(姜柱榮) 등이 다시 조정에 사액(賜額)을 청(請)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사액(賜額)이 미루어지다가 고종 5년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해 이곳 역시 대동(大同) 훼철(毁撤: 헐림.)을 당하였다. 이후 비록 신실(神室: 신위(神位)를 모신 방.)은 헐렸지만, 강당(講堂)에서의 강학(講學)은 영당(影堂) 서당계(書堂契)의 재정 지원으로 지속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요인(要人) 일강(一江) 김철(金澈: 1886~1934) 선생도 여기서 수학(受學)한 이들 중 한 분이다. 일강은 김구(金九)ㆍ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문화부가 2006년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할 만큼 공훈과 명성이 높은 인물이다.
묘장서원 전경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기자 영당(影堂) 서당계(書堂契)에서는 신학문의 필요성을 자각하여 1919년 영신학교(英新學校)를 설립, 교사(敎師)로 현홍욱(玄弘彧), 기건도(奇虔度) 두 분을 초빙하여 신학문(新學問)의 보급에 힘썼다. 그 당시 학생은 정길현(丁吉鉉), 이유신(李有信), 이호신(李浩信), 유준희(柳俊熙), 정병윤(丁炳潤), 이동주(李東珠), 이문채(李文彩), 이경신(李炅信), 이명신(李明信), 이현복(李鉉福), 이동실(李東實), 이국신(李國信), 정휴탁(鄭休卓), 이채(李埰), 유희돈(柳熙敦), 이석진(李錫珍), 이현백(李鉉柏), 이수섭(李壽燮), 이방신(李芳信), 이길신(李吉信) 등이며, 이들은 후일(後日) 지역(地域)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사립 영신학교 관련 이력서
일제(日帝)의 탄압이 심해지자 오랜 강학(講學) 활동은 중단되고, 근읍(近邑)의 사림과 후손들은 1934년 사우(祠宇) 복건(復建)을 추진하여 신실(神室) 3칸에 내삼문(內三門)인 계명문(啓明門), 강당(講堂) 4칸에 외삼문(外三門)인 정의문(正義門) 5칸을 마련하였다.
외삼문(外三門) 정의문(正義門)
내삼문(內三門) 계명문(啓明門)
이 때, 예전부터 모셨던 양도공(襄度公)과 신봉(新峰) 선생 외에 임란 영광수성도별장(壬亂靈光守城都別將) 이응종(李應鍾) 선생, 기축명현(己丑名賢) 이황종(李黃鍾) 선생, 임란 수성종사관(壬亂守城從事官) 효자(孝子) 이홍종(李洪鍾) 선생을 추배(追配)하고, 묘장서원(畝長書院)으로 개액(改額: 현판을 바꿈.)하였다. 묘장서원은 6ㆍ25동란 중에도 면내(面內) 초등학교가 소실(燒失)되자 가교사(假校舍)로 활용되는 등, 실로 수백 년 간 지역문화의 산실(産室)이 되어왔다
2002년 12월 28일에는 선현(先賢)의 향사(享祀) 및 교육(敎育)이라는 묘장서원의 전통 계승을 위하여 사단법인 제76호'묘장영당사(畝長影堂祠) 유적보존회(遺蹟保存會)'가 발족(發足)되었다.(전남도지사 허가, 이사장 李大淵)
법인설립 허가증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지정서
배향(配享) 인물들의 후손(後孫)과 유림(儒林)으로 구성된 본회(本會)에서는 2003년 6월부터 12월까지 도비(道費)와 군비(郡費)를 지원받아 노후(老朽)한 영당사 신실(神室) 건물을 전면 보수(補修)하고, 이곳의 문화재 지정의 필요성을 널리 홍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본회 회원(會員)과 도내(道內) 유지(有志)들의 피땀 어린 노력은 결실을 맺어, 묘장서원은 2004년 2월 13일 드디어 영광묘장영당(靈光畝長影堂)이라는 명칭으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2004년 3월에는 태종대왕의 포총교지(褒寵敎旨) 석각비(石刻碑) 및 세종대왕의 양도공 태종묘정 배향(配享) 교서(敎書) 석각비(石刻碑: 이상 李東奕 國譯.)를 사우(祠宇) 앞에 건립하였고, 공공 예산에 의해 강당(講堂)ㆍ외삼문(外三門)ㆍ담장 등을 포함한 대대적인 보수(補修)ㆍ정비(整備) 공사가 2005년 8월에 시작되어 6개월 후인 2006년 봄에 완료되었다.
태종조 포총교지 석각비
세종조 종묘배향시 교서 석각비
사우(祠宇)의 창건(創建) 이래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中丁: 음력으로 그달에 중순에 드는 丁일)에 사림과 후손들은 양도공의 위대한 공훈(功勳)과 덕행(德行)을 추모(追慕)하며 제사를 올렸으며, 지금까지도 그 전통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양도공(襄度公) 이천우(李天祐)를 위시하여 이 서원(書院)에 모셔진 분들은 모두가 국난(國難) 극복(克服)에 목숨을 걸고 앞장섰거나, 높은 학문(學問)과 인격(人格)으로 후세에 사표(師表)가 되었던 이들이다. 따라서, 묘장서원이 훌륭한 분들의 행적(行蹟)을 추모(追慕)하고 그 얼을 오늘에 되살리는 교육장(敎育場)으로서의 기능을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유지(有志) 제현(諸賢)과 후손(後孫)들의 배전(倍前)의 관심(關心)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묘장 영당사 유적보존회 상임고문 이동혁 정리.)
유학자 신봉(新峰)선생 영정
광해 병진년 기념식수 동백나무
묘장서원 묘정비
(조건상 박사 짓고 이동천 교수 쓰고 이유신 재경 회장 세움)
심원록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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