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 휘(諱) 한(翰)
전주 이씨 시조의 휘(諱)는 한(翰)으로,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배위(配位)는 경주 김씨로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따님이다. 사공 공이 탄생한 곳은 지금의 전주(全州)인 완산(完山)이다. 그러나 공의 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현재 사공공과 경주 김씨의 신주를 모신 조경묘(肇慶廟)가 전주의 경기전 북쪽에 있다.
2세인 자연(自延) 공부터 17세 양무(陽茂) 공까지는 선원계도(璿源系圖)와 같다.
 
목조대왕(穆祖大王)
17세 양무(陽茂) 공의 아들로 휘는 안사(安社)이다. 고려 신종 7년(1204년) 경에 전주(全州)에서 탄생하였다. 전주 주관(州官)의 시기심으로 더 이상 전주에 거주하기가 어려워져 27세가 되던 고종 17년(1230)에 시조 사공 공 이후 대대로 살아온 전주 자만동(滋滿洞 : 지금의 校洞)을 떠나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이주하였다.
고려 조정은 목조대왕을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서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고, 원나라의 조정에서는 오동 천호소(千戶所)를 설치하고 남경(南京) 등의 수천 호(首千戶)로 삼아 다루가치(達魯花赤 : 원나라의 지방 관청의 장관직)를 겸하게 하였다. 고려 원종 15년(1274)에 승하하였으며, 공주(孔州)의 성 남쪽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는 효공황후(孝恭皇后) 이씨이며, 본관은 평창(平昌)으로 슬하에 아들 여섯을 두었다. 사자(嗣子: 대를 잇는 아들)는 익조대왕(翼祖大王)이다. 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 2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 3남은 안풍대군(安豊大君) 정(精), 5남은 안창대군(安昌大君) 매불(梅拂),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익조대왕(翼祖大王)
목조대왕의 4남으로 휘는 행리(行里)이다. 함경도 덕원의 적전사(赤田社)에서 고종 30년(1243) 경에 탄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원종 15년(1274)에 목조대왕이 승하(昇遐)하자, 이듬해인 충렬왕 1년(1275)에 익조대왕이 천호(千戶)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충렬왕 26년(1300)에는 원나라로부터 승사랑(承仕郞)의 관직을 받았으며, 천호의 다루가치를 겸하였다. 9월 10일 승하하였다. 능은 지릉(智陵)으로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에 있다.
배위는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로 본관은 등주(登州)이다. 8남 1녀를 두었는데, 사자(嗣子)는 도조대왕으로 4남이다. 장남은 함녕대군(咸寧大君) 안(安), 차남은 함창대군(咸昌大君) 장(長), 3남은 함원대군(咸原大君) 송(松), 5남은 함천대군(咸川大君) 원(源), 6남은 함릉대군(咸陵大君) 고태(古泰), 7남은 함양대군(咸陽大君) 전(琠), 8남은 함성대군(咸城大君) 응거(應巨)이다. 장녀는 안의공주(安懿公主)로 증 좌군도통제(贈左軍都統制) 주단(朱端)에게 시집갔다.
 
도조대왕(度祖大王)
익조대왕의 4남으로 휘는 춘(椿)이다. 초명은 선래(善來)이며, 몽고명은 패안첩목아(悖顔帖木兒)이다. 함흥의 송두등리(松頭等里)에서 태어났다.
도조대왕은 익조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30호평을 확장하여 안변(安邊)에서 북으로 덕원(德源)에 이르는 전토(田土)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윤관의 여진 정벌로 함흥에 고려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 고려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안변(安邊)에 대농장을 남겨두고 처음에는 영흥(永興)으로, 다시 영흥에서 함흥으로 이주하였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 7월 24일에 승하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찬성사(贊成事)를 추증하였다. 태조 3년(1394)에 도왕(度王)으로 추존하였으며, 능명은 의릉(義陵)으로 함남 흥남시 운남면 운흥리에 있다.
배위는 경순황후 박씨로 본관은 문주(文州)이다.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 박광(朴光)의 딸이다. 5남 3녀를 낳았는데, 사자는 2남인 환조대왕(桓祖大王)이다. 제 1남은 완창대군(完昌大君) 자흥(子興), 3남은 완원대군(完原大君) 자선(子宣), 4남은 완천대군(完川大君) 평(平), 5남은 완성대군(完城大君) 종(宗)이다. 장녀인 문혜공주(文惠公主)는 대장군 문인영(文仁永)에게 시집갔으며, 차녀인 문숙공주(文淑公主)는 다루가치 김마분(金馬粉)에게 시집갔고, 3녀인 문의공주(文懿公主)는 허중(許重)에게 시집갔다.
 
환조대왕(桓祖大王)

도조대왕의 제2남으로 휘는 자춘(子春)이며, 자(字)도 자춘(子春)이다. 고려 충숙왕 2년(1315)에 함경남도 덕원(德原)에서 출생하였다.
환조대왕이 형님 휘 자흥(子興: 完昌大君)이 일찍 돌아가시자, 선친(先親)의 천호(千戶) 직을 이어받았다. 대왕은 후일 조카 교주(咬住 : 후일의 휘 天桂, 고종조에 永城君에 추봉됨.)에게 관직을 돌려주고자 하였으나, 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공민왕 4년(1355)에 고려 조정에서는 그동안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던 영흥(永興)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토벌하였는데, 환조대왕도 정벌군에 내응(內應)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공민왕은 환조대왕에게 대중대부(大仲大夫) 사복경(司僕卿)을 제수하였으며, 개경(開京)에 저택을 하사하였다. 개경으로 이주한 직후에 양광도(楊廣道:충청도)에 왜적이 침입하자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겸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로 임명되어 왜적을 물리쳤다. 이에 공민왕은 통의대부(通義大夫), 정순대부(正順大夫)로 품계를 올리고, 천우위상장군(千牛衛上將軍)을 제수하였다. 공민왕 9년(1360) 다시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제수하였으며, 더불어 목조대왕, 익조대왕, 도조대왕, 환조대왕의 4대에 걸친 천호의 관직에서 만호(萬戶)의 관직으로 승격하여 삭방도(朔方道)로 출발하게 하였다. 환조대왕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가 되어 여진 접경지대를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해 4월 갑자기 병환으로 승하하였으니 보령(寶齡)이 46세였다.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의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다. 배위는 한산(韓山) 이씨(李氏)와 의혜왕후(懿惠王后) 영흥(永興) 최씨(崔氏), 그리고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로, 이씨가 추충절의 보리공신 삼중대광 완산군(推忠節義 輔理功臣 三重大匡 完山君) 원계(元桂)를 낳았으며, 최씨가 태조 성계(成桂)와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간 정화공주(貞和公主)를 낳았고, 김씨는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를 낳았다.

 
완풍대군(完豊大君)

-고려조 추충절의보리공신 완산군ㆍ양평공-
휘(諱: 돌아가신 어른의 이름)는 원계(元桂)이고, 호(號)는 불사재(不思齋)이며, 시호(諡號)는 양평(襄平)이다.
공은 환조대왕(桓祖大王: 휘 子春)의 장남이니,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환조의 배위(配位)가 모두 세 분인데[王凡三娶], 초취(初娶) 부인이 한산 이씨(韓山李氏)이고, 다음이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휘 成桂, 이하 태조로 지칭함.)의 어머니로서 조선 건국 후 의혜왕후(懿惠王后)에 추봉(追封)된 최씨이며, 다음이 의안대군(諱 和)의 어머니인 정안택주(貞安宅主) 김씨이다. 대군의 어머니 이씨가 대군이 4세 되던 해 돌아가시자, 환조께서 최씨에게 다시 장가들어 태조를 낳았으며, 그 후 다시 김씨를 배위(配位)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완산실록(完山實錄)」 및 이색의 「이자춘신도비명(1387)」, 정총ㆍ권근의 「환왕정릉신도비명(1393)」)
공은 고려 충숙왕 17년(1330) 함경도 화령부(和寧府: 후일의 영흥부) 흑석리(黑石里)에서 탄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공과 태조, 의안대군의 3형제는 우애가 매우 두터워 항상 같은 곳에서 함께 거처하였다고 한다.(『태조실록』「총서(總書)」)
공은 유년시절부터 문무(文武)를 겸전하여 가문을 흥성시킬 재목으로 촉망되었다. 유학의 경전(經典)에 통달하고 시(詩)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용맹스럽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武藝)에도 능했다.
청년시절(1366), 공은 아우인 태조와 함께 아버님 환조대왕을 보필하여 원나라로부터 쌍성(雙城) 지역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누차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를 토벌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359년(고려 공민왕 8)에 홍건적(紅巾賊)이 압록강을 건너와 노략질을 하자 이를 격파하여 2등 공신이 되었고, 1361년 2차 침입 때는 내부령(內府令: 종3품)으로서 안우(安祐) 등과 함께 박주(博州)에서 홍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다음 해에 수도인 개경(開京)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1363년에 또다시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이 무렵 공은 그간의 훈공(勳功)에 의해 척산군(陟山君)에 봉군(封君)되었다.
1375년(고려 우왕 1) 원제(元帝)가 고려 국왕으로 임명한 심왕(瀋王) 모자(母子)가 반역자 김의(金義)의 무리를 거느리고 이미 신주(信州)에 도착하였다는 보고에 따라 국방경비를 강화할 때 동지밀직사(同知密直使)였던 공은 원수(元帥)가 되어 서북 방어의 임무를 담당해, 반도(叛徒)들을 막아내었고, 1377년(고려 우왕 3)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상원수(上元帥)인 나세(羅世)와 함께 이를 격파하였다. 1380년(고려 우왕 6) 3월 왜구가 또 다시 광주(光州)·화순(和順)·능성(綾城: 능주)을 침범하자 원수로서 나가 막아냈다.
동년 8월 왜적이 배 500척을 진포(鎭浦: 군산의 옛 이름.)에 매어 두고 양광(楊廣: 충청) · 전라·경상 3도의 연해에서 노략질하자 공은 양광도순찰사(楊廣都巡察使)가 되어 출전, 변안열(邊安烈)과 함께 3도도순찰사인 태조를 도와 남원(南原) 운봉(雲峰)에 이르러 대승하였다. 유명한 이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공은 많은 포로와 말 1,600여 필을 포획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등 큰 전과(戰果)를 올렸다.
이때의 수훈(樹勳)으로 공은 다시 추충절의보리공신(推忠節義輔理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고려조의 가장 높은 위계(位階)인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완산군(完山君)으로 개봉되었다.'완산군'이란 칭호는 아버님 환조는 물론 아우 태조에게도 부여된 바 있었던, 관향(貫鄕: 본관지) 전주(全州)의 옛 이름에서 유래하여 이름지어진 군호(君號)이다. 이후 공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ㆍ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등의 고위 관직을 역임하게 된다.
1388년(고려 우왕 14) 고려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공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우군(右軍)에 소속되어 출전하였다.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렀을 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인 태조가 회군(回軍)하려 하자, 공이 처음에는 고려의 신하로서 차마 그럴 수 없는 일이라 하여 극력 반대하였으나, 대세(大勢)를 거스를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는 회군(回軍)에 협조하게 되었다. 회군하던 해와 조선 개국 후 있었던 두 번의 회군공신 책봉에서 1등공신에 책봉된 아우 의안대군과는 달리 공이 그보다 낮은 2등공신에 책봉되었던 것은 그 무렵의 이 같은 사정, 곧 공의 소극적 참여에서 기인한 결과였다.
위화도 회군 이후 태조를 옹립하려는 기운이 높아지자, 공은 대대로 은혜를 입어 온 고려왕조에 대해 모반(謀反)할 수도 없고, 한편으로는 형제로서의 우애(友愛)를 저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직면하였다. 마침내 공은 네 아들에게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태조)를 도와서 충효(忠孝)를 다하여라.” 유언한 뒤, 다음과 같은'자만(自輓)'의 시를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음독(飮毒) 자결(自決)하였다.

三韓故國身何在(삼한고국신하재)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디인가.
地下願從伯仲遊(지하원종백중유) 죽어 지하에서 태백(泰伯)ㆍ중옹(仲雍)을 만나 놀고 싶어라.
同處休云裁處異(동처휴운재처이) 같은 처지에서 처신함이 다르다 말 마오,
荊蠻不必海浮(형만불필해부부)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목 띄울 일 없어라.

이 시에서 공은, 주나라 고공단보(古公壇父)의 장자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왕위를 막내 동생 계력(季歷: 곧 주문왕의 아버지)에게 양보하고 뗏목을 저어 형만(荊蠻) 땅으로 망명했던 고사(故事)를 인용하며, 그들은 그랬을지언정 자신은 단호히 목숨을 끊어버림으로써 정명(正命)을 다하겠다는 비장한 결의(決意)를 보이고 있다.
이 시는 오랜 세월 동안 절명시(絶命詩)ㆍ필명시(畢命詩) 등으로 이름만 전해왔으나, 1908년(순종 2) 18세 종손 철재(轍在)가 순종(純宗)의 윤허를 받아 공의 묘소를 보수할 때 발견된 지석(誌石: 죽은 사람의 성명·생몰 연월일ㆍ행적ㆍ무덤의 좌향(坐向) 등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묻는 돌 또는 도판(陶板).)에 음각(陰刻)되어 있어서 그 구체적 내용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완풍대군파 학술위원회에서는 위의 시를 정명시(正命詩)로 명명(命名)한 뒤 2004년 10월 서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그 깊은 의미를 분석한 바 있다.
공은 이미 천명(天命: 하늘로부터 받은 목숨)의 소재를 인식했기에, 새 왕조의 도래가 필연적이고 그것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지만, 스스로는 고려의 신하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을 죽음으로써 실천하였다. 강효석(姜斅錫)의 역사서 『대동기문(大東奇聞)』이나 김형재(金亨在)의 『대동소학(大東小學)』은 공을 여말의 대표적 수절신(守節臣)으로 소개하며 높은 절개를 찬양한 바 있지만, 공의 자결(自決)은 단순한 수절(守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곧, 정명사상(正命思想)이 발현된 결단이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구현이었다는 데 그 진정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태조는 등극(登極)한 후에 백형(伯兄)인 공을 완산백(完山伯)으로 추봉하고 `양평(襄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공의 거룩한 행적은, 그러나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들에 의해 기휘(忌諱: 꺼리고 피함)되어 자손들에 의해 구전(口傳)되거나 야사서(野史書)에 등재되었을 뿐, 정사(正史)에는 오를 수 없었고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도 어려웠다.
1872년(고종 9)에 이르러서야 공은 완풍대군(完豊大君) 겸 영종정경(領宗正卿)으로 추증(追贈)되고, 자손들은 4세봉군(四世封君) 겸 종정경(宗正卿) 증직의 은전(恩典)을 입게 되었다. 영종정경(領宗正卿)이란, 조선 후기의 종친부의 명예 관직으로, 1869년(고종 6)에 처음으로 설치되어 왕의 아들들에게 봉작과 함께 주어졌으며, 품계(品階)는 정1품을 초월하는 무계(無階)이다.
공의 묘소는 함흥시 북주 동면 경흥리 귀주동 정릉(定陵) 오른쪽 언덕에 있다. 「묘비문(墓碑文)」과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순종 때 왕실지친이었던 종정원경(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재완(載完)이 찬술하였다.

= 흥 경 단(興慶壇) =
남북 분단으로 묘전에서 향사(享祀)를 올릴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긴 후손들은 1984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 장자(長子) 안소공의 묘역(墓域) 안에 흥경단(興慶壇)을 조성하여 매년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세일제(歲一祭)를 봉행하고 있다.
배위는 부부인(府夫人: 조선시대 외명부의 하나로 왕비의 어머니나 대군의 처에게 내린 칭호.) 남평 문씨(南平文氏)와 부부인 경주 김씨(慶州金씨)이다. 두 분은 고려조에 이미 대군의 작위(爵位)에 따라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진 바 있다. 남평 문씨는 문익점(文益漸 : 목화를 전래한 분)의 따님으로 2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안소공(安昭公) 양우(良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양도공(襄度公) 천우(天祐)이고, 딸은 중랑장(中郞將) 이인우(李仁雨)에게 시집갔다. 경주 김씨는 찬성사 용(鏞)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완남군(完南君) 조(朝)·완녕군(完寧君) 서(曙)이고, 딸은 생원(生員) 노신(盧愼), 승지(承旨) 춘당(春堂) 변중량(卞仲良)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조ㆍ태종실록, 승정원일기, 동사강목(안정복), 포은집(정몽주), 춘당집(변중량), 완산실록, 대동기문(강효석), 전주이씨완풍대군파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인물전승3, 완풍보감(완풍대군파 학술위원회) 등.
= 완풍보감 =
 
주요논문
이원계 문헌 전승의 연구(이창헌, 1998, 동국대 발표, 『고려인물전승3』에 수록.)
여말 선초 완풍대군 이원계의 생애와 사상(이현중, 2000, 동서철학연구 20)
완풍대군 이원계 공의 절명성인시에 관한 인생경영론적 연구(이훈섭, 2001, 한국전통상학연구 18)
완풍대군과 부해시(송백헌, 2004, 충북대 『개신어문연구』 제2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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